[한국전쟁과 네이팜탄] 2. 곡계굴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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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추위 피해간 주민 등 굴에서 몰살

1951년 1월 미 10군단의 '싹쓸이 작전' 지역 중 한 곳인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는 네이팜탄 폭격으로 주민이 떼죽음을 당하기 전까지는 60호 가량이 모여 사는 고요한 산골마을이었다.

"도둑조차 오지 못할 정도"로 산이 깊어, 전쟁이 터진지 6개월여가 지난 당시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전혀 실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곳에도, 51년 1월 7일 피란 명령이 떨어졌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고립된 인민군 패잔병들이 후퇴를 하면서 마을을 거쳐 갔고 계곡에는 포성이 울려댔다.

주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나섰다. 그러나 20리쯤 가다 탱크를 앞세운 미군에 가로막혀 되돌아오고 말았다. 신원이 확인된 면사무소 직원 등 극소수만 미군 저지선을 지나갈 수 있었다.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인민군이 피란민 사이에 끼어 후방으로 침투할 것을 우려한 미군이 이들의 길을 막은 것이다.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땐 강원도 영월ㆍ평창 등지에서 온 피란민 200여 명까지 가세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주민과 피란민들은 만일에 대비해 마을 근처 곡계굴로 들어갔다. 곡계굴은 깊이가 200m 가량 되는 석회암 동굴로, 입구가 단단한 암석으로 되어 있어 추위는 물론 포격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일제 강제동원에 끌려갔다 돌아온 한 주민이 "이 정도면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다"고 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400명가량이 굴속에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굴 바닥에는 한겨울 냉기를 피하기 위해 짚을 깔고 덩치 큰 짐은 굴 입구 근처에다 쌓아 두었다.

20일 오전 9시30분께 곡계굴 상공에 미군 정찰기 한대가 나타났다. 하지만 전날에도 정찰기가 하루 종일 선회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정찰기가 사라진 직후 서쪽 하늘에 전투기 4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기들은 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굴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듯 저공비행을 하더니 폭탄을 내던졌다.

'쾅… 쾅…' 굉음에 이어 불길이 치솟았다. 기총사격으로 돌이 튀고 흙먼지가 일었다. 굴 밖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굴 안으로 뛰어들었고, 일부는 근처 밭 배수로에 몸을 숨겼다.

땅바닥이 기름 같은 물질로 번질거렸다. 끈적이는 그것에 몸이 닿자 불이 붙었다. 네이팜탄이 떨어진 것이다.

무차별 폭격은 3시간가량이나 이어졌다. 굴 입구에서 10여m 들어온 지점까지 불이 붙었고, 시커먼 유독가스가 밀려들었다. 캄캄한 굴속은 비명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생과 어머니 등 가족 4명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조병우(64) 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굴 밖으로 도망을 치는데 시신들이 밟혀 물컹거렸다"고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전했다

곡계굴 유족대책위는 365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마을이 한양 조 씨 집성촌이다 보니 조 씨 일가는 80% 가량이 희생됐다.

폭격이 끝난 뒤,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굴속은 시신으로 가득 했고 그을린 시신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존자들이 수습에 나섰지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땅이 얼어붙어 제대로 묻을 수도 없었다. 강원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은 생존한 가족이 없다보니 시신이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피란을 갖다 두 달만에 돌아온 면사무소 직원 조태원(81)씨가 시신수습에 나섰다.

"소백산을 넘어 마을로 들어서는데 어찌나 냄새가 나던지…억장이 무너지더군요. 인부 5명을 구해 굴속에서 시신을 지어냈는데 꼬박 20일이 걸렸습니다. "

조 씨는 "시신들이 불에 타서 누가누군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면서 "개가 물고 다니던 머리에 달린 비녀를 보고 자신의 어머니임을 확인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곡계굴 민간인 피해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본보가 입수한 제5공군 사령부 51년 1월 20일자 일일 작전보고서 내용 중 10군단 지역 전투상황에는 영춘을 폭격해 가옥 25채를 완파하고 30채는 부분적으로 파괴했으며 인민군(troop) 40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곡계굴 폭격 과정에서 가옥 20여채가 소실됐다고 주장해 왔었다.

유족들은 "폭격이 있은 뒤 미군이 굴속에 있던 시신을 촬영해 갔다는 증언이 있다"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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