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마테호른
세상이 붙인 '딱지'에 갇혀 살 것인가
소년이 부르는 '마태 수난곡'의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무표정한 남자가 화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거실에서 가만히 음악을 듣던 이 남자는 창밖을 흘끔거리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뛰쳐나간다. 며칠 전부터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수상한 사내에게 무슨 일로 그러는지 따져 묻더니 이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생활하며 돌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가슴속 응어리가 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터놓고, 누군가는 가족에게 매달린다. 이도 저도 없을 땐 심리 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누구라도 평생 응어리를 품고 살 순 없단 거다. '마테호른'은 바로 그 가슴속 얼음덩어리가 찬찬히 녹아내리는 과정을 응시하는 영화다. 타인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이 정해 놓은 규칙과 일정에 맞춰 생활하던 프레드(톤 카스)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아들마저 가출해 버려 홀로 외롭게 살아간다. 그런 프레드의 건조한 일상에 어느 날 사고로 뇌기능이 손상되어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테오(르네 반트 호프)가 불쑥 들어온다.
상처 입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
주변 오해 상관없이 서로에 집중
이들은 '마테호른'에 오를 수 있을까
영화는 프레드가 왜 테오를 데려와 돌보는지, 테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상한 남자의 이름이 테오라는 사실조차 영화 후반부에나 나온다. 신기한 건 그럼에도 별다른 의문 없이 영화의 호흡에 빨려 들어간다는 점이다.
테오를 돌보고 정을 쏟는 프레드의 '당연한' 태도가 주변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프레드는 테오를 돌보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동성애자라는 오해까지 사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 당연하고 당당한 태도가 어느새 관객에게까지 전이되어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된 관계가 아닌 테오와 프레드가 주고받는 순수한 교감에 주목하게 만든다.
테오와 마테호른으로 여행을 떠나려는 프레드의 결심 이후 후반부에 숨겨진 사실을 공개하며 제법 파괴력 있는 결말에 도달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게 어떤 사연이든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프레드가 마음을 바꾼 순간, 자신이 그어 놓은 원 밖으로 발을 내딛을 결심을 한 순간 세상은 이미 변화한다. '마테호른'은 그 변화를 받아들인 준비와 용기의 가치를 차분하고 담담한 톤으로 풀어 놓는 영화다.
언뜻 불친절하게까지 보이는 서사가 불편하지 않는 건 매순간 오롯이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두 남자의 진심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실한 교인, 지체장애인, 동성애자, 그것이 무엇이든 세상이 붙여 놓은 딱지를 떼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관계를 직시하는 것. '이게 나야'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만큼 소중한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용기.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지켜볼 만한 가치 있는 목소리다. 9일 개봉.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