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코로나에 묻힌 ‘산재 공화국’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한국의 1970년대는 산업사회로의 이동이 급진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경제발전을 명분 삼은 노동력 착취에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은 차단됐다. 한국 사회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의 희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에 그 참담한 현실이 잘 나와 있다. 난쟁이의 딸 영희가 졸음과 싸우며 밤새워 일하는 모습은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난쏘공〉이 짧고 담담한 문장과 참혹한 서정으로 드러낸 것은,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 삶과 그것이 빚어낸 공포였다.


열악한 노동 현실과 산업 재해

지금도 비정규직 중심으로 되풀이

한국, 산재 사망률 OECD 1위 오명

올해 1분기 사망자 작년보다 많아

코로나 민감해도 산재엔 무관심

정부·정치권 노동 현장 개선 힘써야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는 변화했는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로 인한 감염 공포에 그토록 민감하면서도 노동자의 죽음엔 더없이 무감한, 참으로 이상한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1994년 통계가 시작된 이후 두 번을 제외하곤 OECD 중 산재 사망률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전국적으로 지지난해 971명, 지난해 855명이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 해 동안 매일 세 명꼴로 죽은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올해 1분기 산재 사망자 수는 253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오히려 더 늘어났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발전소에서 일하다 변을 당한 김용균 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2년 전 서울 구의역 지하철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모 군의 죽음도 잊을 수 없다. 지난주가 김 군의 사망 4주기였다. 이 땅의 노동 현실이 조금씩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다. 질식해 숨지고 떨어져 죽고 깔려서 목숨을 잃는다. 지난 4월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화재 참사는 무려 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믿기지 않는 죽음들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엔 ‘폭발’ ‘붕괴’ ‘추락’ ‘매몰’ ‘절단’ ‘압착’ ‘충돌’ 같은 잔혹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약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가 아니고 무엇인가.” 소설가 김훈이 지난해부터 ‘생명안전시민넷’이라는 단체의 공동대표까지 맡으면서 통탄하고 통탄했던 이유다.

조선·자동차 업종이 밀집해 22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부·울·경 지역은 전국에서도 ‘위험의 외주화’가 손꼽히는 곳이다. 부산의 경우 실습 위주로 교육받는 특성화·마이스터고 학생들까지 위험한 노동 환경에 내몰려 있다. 시설 노후화가 심각한 항만도 위험천만한 노동 현장이다. 2018년부터 2년간 여덟 차례의 사망 사고가 발생한 부산항은 전국 4대항 중 사망자 수가 가장 많다.

공동체의 위기나 비상 상황에서는 가진 것 없고 소외돼 있는 약자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법이다. 〈난쏘공〉이 그려 낸 열악한 노동 현실은 지금 건설 일용직, 하청업체 직원, 비정규직 노동자, 현장 실습생, 이주 노동자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우리나라 산재 사망 사고 10명 중 9명은 하청노동자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기 사망 위험성은 정규직의 3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차별을 견디고 있는 이가 수백만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차별받는 집단이 이주 노동자들이다. 한국 사회의 필요로 불려온 이들은 천리타향 이국에서 터무니없는 죽음을 맞곤 한다. 타국에서 사고를 당해 주검으로 가족에게 인계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명을 이어 갈 권리가 이주 노동자에게도 꼭 필요하다.

코로나19 사태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고 하지만 노동 분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고의 진상은 밝히고 책임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조차 제대로 안 지켜지고 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법적 장치다. 인명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와 경영자·관리 감독 기관을 형사처벌 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2017년 노회찬 의원이 발의했지만 20대 국회에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폐기됐다. 일부 유해·위험 작업의 하도급을 금지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김용균법)도 빈틈이 많다. 사망사고가 일어나도 중간관리자만 처벌받거나 원청업체는 법적 책임에서 빠지는 맹점을 보완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달 출범 3년을 넘긴 문재인 정부는 엊그제 ‘한국판 뉴딜’ 정책의 큰 그림을 발표했다. 산업 활성화도 좋고 일자리 확대도 좋다. 그런데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보듬으려는 포용의 의지가 없다. 노동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법적 제재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정부가 노동 현장 개선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코로나 방역처럼 산재 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그렇지 않고서는 끝없는 죽음의 굴레, ‘산재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경제성장의 주역인 산재 노동자를 언제까지 잊힌 존재로 방치할 건가.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