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치유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 국가폭력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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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건,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비극은 현재진행형
진상 규명과 피해자 구제 위한 법·제도적 대처 아직 미흡


사북사건 피해자들이 2001년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사무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부산일보 DB 사북사건 피해자들이 2001년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사무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부산일보 DB

■“국가폭력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고문”


지난 21일은 사북사건 4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북사건은 1980년 4월 21일부터 나흘간 강원도 정선의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노동자와 가족 등 6000여 명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 시위를 벌인 일을 말합니다. 경찰과 대치하던 노동자들은 4월 24일 사태 종식에 합의했으나,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이들을 폭도로 규정해 대대적으로 연행했습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일은 전두환 신군부의 인권 말살 사례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실체가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난 20일 정선지역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당시 피해자 150명의 명단과 함께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의 실상과 특이점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연구소가 한 일간지를 통해 밝힌 내용이 사뭇 충격적입니다.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조사실 내부에는 각목, 포승줄, 고무호스, 곡괭이, 주전자 등 고문 도구가 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떤 사람은 ‘통닭구이’ 상태로 허공에 매달려 폭행을 당했다. 두들겨 맞다가 다른 공간으로 끌려가 물고문도 당했다. 옆 조사실에서 다른 사람이 구타당하는 것이 보였다. 성고문까지 병행된 조사실에서 피해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방치됐다.’

좁은 공간에 남녀를 몰아넣고 사실상 공개 고문을 자행했던 겁니다. 보고서는 ‘국가폭력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장 야만적인 고문’이라 지적했습니다. 41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 진상 규명은 물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구제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조차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4월 국회 통과 불투명한 여순사건 특별법


지난 1월 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법정에서 이례적인 장면이 보였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과 관련해 내란 혐의로 사형된 장환봉 씨에 대해 유족이 청구한 재심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증거 없음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면서, “장환봉 님은 국가가 혼란한 시기 성실히 근무했던 철도 공무원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며 “더 일찍 명예 회복을 해드리지 못한 점을 국가를 대신해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여순사건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 회복 등을 위하여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여순사건은 1948년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사건입니다. 좌·우익이 대립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많게는 5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철도 기관사로 있던 장 씨는 여수 군인들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체포돼 22일 만에 처형됐습니다.

장 씨는 뒤늦게나마 명예 회복이 됐지만 아직도 많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2001년 이후 작년까지 국회에서 4차례 발의됐으나 모두 상임위원회에 계류되면서 자동 폐기됐습니다. 21대 국회에 들어선 올해 다시 여순사건 특별법이 발의된 상태지만, 여러 현안에 밀려 이번 4월 국회에서 통과될지는 불투명합니다.


1998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회원들이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양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하는 모습. 부산일보 DB 1998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회원들이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양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하는 모습. 부산일보 DB

■특별법 개정안 통과로 새 전기 마련된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의 계기가 된 제주 4·3사건도 오랜 세월 우리 현대사의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벌어진 남조선노동당 무장대와 정부군 토벌대 간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주민이 죽거나 실종된 사건을 말합니다. 2000~2018년 조사에서 9만 4980여 명이 희생자와 유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군경을 비롯해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의 잔학성은 치가 떨릴 정도였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제주 4·3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에 보이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증언입니다.

다행히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2000년 1월 제정·공포됐고, 올 2월 26일엔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특별법이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면, 개정안에서는 4·3사건으로 수형 생활을 한 이들의 재심 규정이 만들어지고,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보상의 실마리가 마련됐으며, 정부 차원의 추가 진상조사를 재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 배·보상 방안, 수형인들에 대한 일괄 재심, 추가 진상 조사 일정과 방법 등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은 것입니다.


2006년 5월 12일 제주시 화북천 하류 재해상습지 개선 공사현장에서 발굴한 제주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부산일보DB 2006년 5월 12일 제주시 화북천 하류 재해상습지 개선 공사현장에서 발굴한 제주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부산일보DB

■우리 안의 상처 보듬으려는 진지한 노력 있어야


이처럼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숱한 비극이 존재했습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그 참상이 알려지고 법적인 보상이나 진상 규명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사례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 상처가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얀마 군부의 잔학성이 세계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의 총질에 숨진 시민이 알려진 것만 700명이 넘고 심지어 집에 있던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고 있습니다. 또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돼 폭행과 고문을 당합니다.

그런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우리는 그런 비극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북사건, 여순사건, 제주 4·3사건에서 보듯이 국가폭력, 즉 잘못된 공권력으로 빚어진 무차별적 인권 말살 행위로 인한 상처는 우리 내부에 오랜 세월 곪은 채로 가려져 있습니다. 잔학한 군부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안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곪은 상처를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큰 병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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