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曉의 파계는 他意였다.
元曉사상 연구소장 沈載烈씨 삼국유사 기록 反證
신라의 고승 원효와 요석공주의 인연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원효의 自意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종무열왕의 책략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효가 어느날 미친 듯이 거리에서 큰 소리로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허락할 것인가. 내가 하늘을 버릴 기둥을 깎아볼까나』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太宗이 이를 듣고 이르되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賢子를 얻고자 하는도다. 나라에 大賢이 있으면 그 利가 莫大하도다』하여 요석궁의 공주와 인연을 맺게 하여 설총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같은 史실에 대하여 원효사상연구소장 沈載烈씨는 새로운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沈소장은 『원효 스스로가 이같은 소리를 했을 리가 없다. 불교교리상 특히 원효의 계율관에 비추어 보아도 위배되는 것이다. 이는 태종의 선의에 의한 책략적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沈소장은 자기 주장의 방증으로 당시보다 3백년 앞선 중국의 예를 들고 있다. 즉 後秦의 姚興王이 스승 鳩摩羅什을 흠모해 자신의 스승으로 받들고 미희 10여 명으로 하여금 시봉케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무열왕은 중국의 이같은 예를 연상하여 원효로 하여금 요석궁에 들게하는 책략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태종의 생각은 원효가 비구승으로서 수행하다가 그의 생각이 그치게 되면 그 한몸에 머문다.
그러나 그토록 큰 인재가 대를 잇게되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원효의 파계를 획책하게 됐다고 沈소장은 주장한다.
沈소장은 또 원효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는 그 당시 요석궁을 나와서도 여전히 法服을 입고 승려행세를 했을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효는 요석궁을 다녀나온 후엔 「소성거사」「복성거사」로 자처하며 전보다 더한 난행, 고행을 한 행적을 보아서도 원효와 요석궁의 인연은 원효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沈소장은 그간 원효의 계율관계 저서를 망라하여 「元曉의 倫理觀」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沈소장은 『그토록 계율정신에 투철한 원효가 스스로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르고 요석궁과 인연을 가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비구승이 어떤 동기에서든 求女의 의사표시를, 그것도 시중에서 큰 노래로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沈소장은 『나의 이 연구는 원효가 자의에 의해 파계하고 莫行莫食했다고 잘못 이해되어 지금의 승려들이 이를 내세워 계율정신에 어긋난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대한 경종으로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