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25)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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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침입 감시한 부산의 '정보통신'

해운대 지역에 침입하던 왜적을 감시하던 간비오봉수대의 전경.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통신을 이용하여 전자우편을 주고받고 있다.여기다 위성 통신을 통해서는 적의 침략과 같은 국가의 위기는 물론 지구상의 작은 움직임 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다시 말해,우리는 흔히 말하는 정보화 시대,정보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정보 통신의 원형이 우리 역사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전화와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에 적이 침입하거나 천재 지변이 일어나면 어떻게 중앙 정부에 알렸을까.며칠을 말을 바꾸어 타고 달려서 알리는 일보다 빠른 방법은 없었을까.

1885년 서울~인천간의 전신 개통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근대 통신이 발전하였지만 그 이전의 고대 통신으로는 봉수,우역및 파발 등이 있었다.특히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봉횃불)으로 밤에는 수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로 국가의 정치.군사적 전보기능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의 종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로 서울 목멱산(남산)에 위치한 경봉수,국경선이나 해륙 변경의 제일선에 설치된 연변봉수,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 등 세 종류가 존재했다.또한 이것은 초기 거화 지점에서 서울까지의 가장 단거리를 잇는 직선 봉수인 직봉과 직봉 중간거점을 이은 간봉으로 구별하기도 한다.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지만,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한반도에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의종대이다.1149년(의종 3)에 서북면 병마사 조진약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평시의 경우 야간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각각 1거를 올리고,보통 위급시에는 각 2번을,3급(정세 긴급)에는 각 3번을,4급(정세 초긴급)에는 각 4번씩을 올리도록 규정하고,각 봉수대에는 방정 2인과 일반백성 20인을 배치하되 그들에게 평전 1결씩을 지급하기로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당시 봉수의 거화수 규정과 봉수군의 생활 대책 그리고 감독책임자의 배치 등과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고려의 봉수제는 원 지배기에 들어가면서 점차 무너지고 원나라 식으로 변질된듯하나 그 후 원의 간섭이 점차 사라지면서 고려의 봉수는 다시 재편되었다.

조선개국후 세종 때에 이르러 종래의 봉수제가 면모를 일신하였다.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거화거수등 규정을 새로 정하였고,제도연변의 각 연대를 새로 축조하였으며,또한 봉수선로를 일제히 확정하는 등 그 면모를 일신 했던 것이다.1444년 10월에서 1445년 3월에 걸쳐 활발하게 논의된 봉수 구폐책은 세종 초기에 일단 그 면모를 새롭게 한 고려 이래의 전통적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세종 중기 이후 약 20년간 계속된 야인과의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봉수의 시설,관장,요원 및 그들에 대한 상벌 등 전반적으로 봉수제를 정비한 개혁적 조치였다.

그러면 부산의 봉수대는 언제 어느 곳에 설치되었을까.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7년(1461)에 이미 부산지방에 동평현의 석성봉수대,동래현의 황령산봉수대,동래현의 간비오봉수대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이 세 봉수대는 세종 단종대에 진관의 방비에 비상통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황령산 봉수대는 부산포를 방수하는 해안초소로서,그리고 간비오우동)봉수대는 해운대 만호진을,석성(천마산정)봉수대는 다대포 만호진을 방수하는 후망소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판단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성 남산 봉수 5소가 설치되고 제5거준까지의 전국 봉수 노선과 그 상준처가 정해진 것은 세종 5년(1459)3월이었다.이때 제2봉화노선의 초기 봉처인 부산지방의 봉수상준순서의 경로는,석성 봉수->황령산봉수->간비오봉수->기장 남산봉수->울산 임을랑포봉수로 연결되는 해안선을 따라 북상,영해서 안동으로 이어져 남산까지 19개를 거쳐 중앙에 도달했다.

그러나 "경상도속찬지리지"의 봉화상준처를 보면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봉수 소재지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그것은 앞의 3개소의 봉수대에 첨가해 동래현에 계명산봉수,양산의 위천봉수,언양의 부로이산봉수가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따라서 후기의 직봉은 동래 계명산 봉수->양산 위천봉수->언양 부로이봉수->경주 소산봉수로 이어지는 등 내륙으로 연결되는 10개소를 거치도록해 서울까지의 연락시간을 단축시켰다.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는 4개의 봉수대가 있고,중종 25년(1530)새로 만던 봉수로는 응봉이 첨가되고 있다.즉 중종대에는 동래현 관하에 5개처 봉수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간의 변천을 살펴보면 예종 원년("경상도속찬지리지"편찬)에서 성종 12년("동국여지승람"편찬)사이에 석성 봉수대가 폐지되고 새로이 오해야항봉수대가 신설되었고 성종 12년 이후 중종 25년("신증동국여지승람"편찬)사이에 다대포 두송산정에 응봉수가 신설된 것 같다.

이렇게 바뀌게 된 동기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성종 21년(1490)에 부산포.다대포에 축성한 일이 있고 또 중종 5년(1510)에 삼포왜란이 있었으며 그 후 중종 9년에는 해운포를 축성하고 동왕 17년에는 미조항과 동왕 39년 가덕도에 진관을 신설한 것을 비롯해 부산포 진관에 서평포를 역시 신설한 점 등으로 미뤄봐 이때 이러한 일련의 시책과 함께 봉수제의 개혁이 수반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면 중종대까지 있었던 부산의 봉수대는 어디에 위치하였을까.

계명산봉수는 지금의 범어사 동북에 있었고,황령산봉수는 지금도 양정동의 황령산에 유적이 남아 있으며,간비오봉수는 장산 줄기의 남쪽 봉우리로서 해운대쪽이다.지금도 산정에 유적이라고 추측되는 것이 발견된다.구봉봉수는 초량 뒷산으로 유적도 일부 남아있다.오해야항봉수는 아마도 지금의 적기.용당동 일대가 오해야항으로 추측되며,후면의 산정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나 범일동 앞에 있었던 섬으로 매축 공사 때 없어진 것이라는 설과 신선대 동방 산상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응봉봉수는 두송산에 있었는데,지금의 다대포 마을 북쪽에 있는 연봉이 두송산이다.석성봉수는 지금의 천마산이 석성산으로서,여기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전국적인 봉수조직이 편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봉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는 문제점도 많았다.그것은 봉화군의 고역으로 인한 도산과 근무태만,시설과 장비.보급품의 부족,요원배치의 불충분,그리고 자연조건,즉 나무가 가리우고 구름과 바람 등의 장애로 후망이 불가능하거나 중도에 봉화가 끊어진 데 기인한다.실제로 1510년(중종5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웅천천)이 함락되어서도 봉군은 거화하지 못하였고,1544년(중종 39년)에 사량진 왜변이 일어났을 때도 허위로 봉화가 올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기존의 봉수제도가 갖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숙종대 이후부터는 무너진 봉수대의 수축이나 봉수대의 추가 설치,그리고 봉수군의 근무 조건 개선이나 봉수군의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는 등의 제반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이처럼 봉수제는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에 유효한 정보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전기.전화 등 서양의 근대 문명이 도입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우리 나라에서 봉수제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1894년(고종 31)에 현대적인 전화통신체제로 전환되면서 부터였다.

이정수 동서대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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