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예술혼] 먼구름 한형석(연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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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예술에 혼 사른 영원한 연극인

먼구름 한형석 선생이 63년 대만 문화사범대 재직시 현지 경극배우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1956년 부산대학교 본관 끝에 있는 교수휴게실에서 먼구름 한형석(韓亨錫.1910∼1996)선생을 처음 만나 인사하게 됐는데 중국어를 담당하는 분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필자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느날 부산 광복동에 있는 보리수다방에서 창밖을 내다 보았을때 수많은 사람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감색 코트에 흰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던,그때 그분이었다.

이제 가까이 보니 실제 우리말이 조금 서툰 듯 했지만 얼굴에는 지성미가 풍겼다.

필자는 앞으로 학교휴게실에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는 동래 태생이다.

부친은 일찍이 일본에서 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후 구국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 한흥교(韓興敎)선생이었다.

먼구름은 1915년 다섯살 때 어머니를 따라 중국에 가서 기초교육을 받고 계속 공부를 해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을 졸업했다.

1962년 가을 부산대 문과계 교수연구실 신관이 준공됐을 때 연구실이 부족해 일부는 하나의 연구실을 2명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됐다.

1층 101호 연구실에서 당분간 필자와 먼구름이 함께 쓰게 된 인연으로 여러 전후담을 듣게 됐다.중국에서 쓰던 아호 한유(韓悠)를 먼구름으로 바꾼 것도 이 때였다.

먼구름은 중국 경극에 조예가 깊었다.당시 민속학자 최상수(崔常壽)선생이 먼구름을 경극 연구의 대가로 칭할 만큼 그의 경극역사와 극작술에 대한 조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연극 연구에 심취해 있던 필자는 먼구름으로부터 중국의 고가극(古歌劇)형성과 극리(劇理)도 조금씩 알게 됐다.

1940년부터 5년간을 이범석 장군과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8년에 함께 귀국할 때 얽힌 이야기,1953년에 부산 서구 부용동 천마산 산복도로 위 변전소 뒤편 비탈밭에 세운 판자건물의 '자유 아동문화원'에서 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을 2년간 운영한 이야기도 듣게 됐다.

또 부산 임시수도 시절 국립문화극장 건립과 관련된 일화도 들려주었다.

당시 국립극장 문제는 먼구름이 일찍부터 극장장의 임무를 맡고 추진 했지만 건물 물색이 되지 않아 신창동의 보래관(寶來館)이라는 영화관을 개축해 사용했다.

유치진 선생이 추천한 박재성 작 '산비둘기'를 제1회 공연으로 할 예정으로 극장에 간판까지 올렸지만 뜻하지 않았던 화재로 공연은 취소되고 국립극장 추진도 무산됐다.

먼구름은 밖에서는 줄곧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고 양초(洋草)와 풍년초를 섞어서 지니고 다녔다.

필자가 담배가 떨어졌다고 하면 언제든지 담배종이로 예쁘게 말아 주셨다.이 것을 받아 피운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마음이 너그러워 먼구름의 성난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사 어려운 일을 호소하면 유연하게 돌아나가는 요령을 적절히 일러 주었다.

그러니 그와 만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렇게 마음이 툭 트인 인품은 중국 대륙형이 분명했다.

어느 가을날 파이프를 입에 물고 광복동 거리를 지나갈 때의 이야기이다.

양담배 단속 시기여서 전매청 단속반이 양초의 고소한 냄새를 맡고 뒤따르는 것을 눈치챈 먼구름이 당당하게 어느 점포에 들러 유창한 중국어로 외국인 행세를 해 그 '추행자(追行者)'를 피해나가 동광동 단골주점 '골목집'에서 큰 웃음을 터뜨린 일은 먼구름의 비밀담이다.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는 1963년 예총 부산시지부(당시 한영교 지부장)는 한국연극협회 부산시지부를 창설하면서 먼구름을 초대 지부장으로,필자를 부지부장으로 지명했다.

당시 먼구름과 필자는 연극협회 간사회를 조직하는 한편 직속단체로 '샛불극회'를 운영하면서 하유상 작,이덕선 연출의 '젊은 세대의 백서'라는 작품을 왕자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그러나 계속 후속 활동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먼구름은 대만 문화사범대학 교수로 떠났다.

당시 연극계는 소극장운동이 활발히 벌어지는 추세였다.

먼구름이 구축해 놓은 연극협회 부산시지부의 기반은 어지러워지고 소극장의 백화제방(百花齊放)시대에 접어들게 됐다.

그후 먼구름이 귀국해 소극장운동이 펼쳐지는 양상을 보고는 슬그머니 연극협회를 물러났다.

먼구름은 이후 동래야유를 앞세운 동래민속예술보존협회 육성에 앞장선다.

특히 1967년 3월 독일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 부산방문 환영행사 기획을 도맡아 성대하게 치러냈다.

당시 필자는 민속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먼구름의 동반자가 됐다.

이같은 민속예술에 대한 관심과 연극에 대한 열정이 어우러져 먼구름은 1969년 정초에 '탈극 순절도(殉節圖)'라는 전체 6과장으로 된 창작본을 출간하게 됐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무대화 되지 못한 이 창작본은 앞으로도 우리나라 탈극 무대화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경극에서 출발한 먼구름의 연극 연구가 우리나라 탈극으로 발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창작본의 뒷면에는 그의 창작업적(1937∼1941년)이 게재돼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느 폴란드 예술가의 조국광복을 위한 지하운동을 내용으로 한 가극 '여나(麗娜)',항일 가곡집 '승리만세',항일 연극 '한국 용사',항일 가극 '아리랑',광복군가 '조국행진''압록강 행진곡''국기가''총 어깨 메고''항일광복군가',항일 아동가극 '승리무곡',아동 시극 '하일대(下一代)',아동극 '소산양(小山羊)'등이다.

먼구름은 독특한 서체의 붓글씨로도 유명했다.

중국류 서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먼구름 자신의 창제(創製)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대부분 한자 글씨지만 한글체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먼구름의 자취가 닿은 곳에는 더러 그의 글씨가 남아 있겠지만 지금도 동광동에 있는 멋쟁이들의 휴식처 부산포(옛 골목집)에는 '그냥 갈 수 없잖아'라는 먼구름의 글 액자가 있다.

먼구름은 심기가 좋은 때면 지난날을 회상해서인지 '이 광복군 노병(老兵)은 살아 있다'고 외쳤는데,어느덧 노병(老病)에 잡혀 우리 곁을 떠난 그가 몹시도 그립다.

그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녹아 있는 휘파람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서 국영 부산연극학회장.전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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