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이 만난 우리시대 가수] <8> 신중현 (상)
'대중음악은 과거·미래 아닌 현재의 우리 모습'
'록과 소울,모던 재즈,라틴 음악 같은 저들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당시 우리 대중음악의 빈약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일본 문화인 트로트를 극복하는 새롭고 다양한 음악 통로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색소폰을 중심으로 하는,1960년대 전반에 유행했던 현미와 최희준의 노래들도 따지고 보면 5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일본적인 '블루스' 음악이다. 그와 같은 슬로 템포의 춤 음악은 '00클라브' 같은 이름의 카바레를 기반으로 붐을 조성했다. 나는 그런 음악에 대해 트로트만큼이나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고,보다 '한국적인' 음악이 창작되어야 일본인들이 찍소리를 못할 텐데 하는 음악적 열망에 불탔던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 것'만 주장해서는 안된다. 국악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것과 세계적인 조류를 조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음악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대의 음악이다. 현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상인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후세들이 바로 이를 통해 역사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기가 정치적인 탄압을 받고 사라진 2년 뒤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또 한 사람의 불세출의 '비극적인 영웅'을 영접한다. 하지만 그는 신인이 아니라 이미 '히트곡 제조기'로서의 명성을 움켜쥔 신중현이었다. 그는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엽전들'이라는 자괴감이 넘치는 3인조 밴드의 수장이 되어 어느 누구도 가지 못했던 길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김민기가 경기고와 서울대라는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면 신중현은 전쟁과 미8군 무대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시밭길을 헤쳐 온 낙오자(Dropout) 정신의 화신이었다.
김민기가 현실주의적인 상상력으로 대중음악도 역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기념비를 세웠다면 신중현은 음과 소리와 퍼포먼스를 통해 일본과 미국이라는 '한국 대중음악의 초자아'를 넘어서 변방의 대중음악이 독자적인 예술 문법을 창조할 수 있다는 바벨탑을 쌓았다. 김민기의 71년 앨범은 시장에서 사라져 '어둠 속의 신화'로 남았지만 '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은 당시 1차 오일 쇼크로 뿌리채 흔들리던 음반산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고,이 앨범의 머리곡 '미인'은 글자 그대로 '삼천만의 애창곡'이 되었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폭발적인 성공은 이 노래와 그것이 수록된 앨범이 품고 있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진정성을 한 켠으로 밀어놓는 데 기여했다. 가장 기본적인 록 밴드의 형태를 갖춘 신중현과 두 명의 동료들은 일본 엔카의 오음계 대신 한국의 계면조에 입각한 오음계를 훌륭하게 형상화했고,서구 록음악의 보편적인 4박자 리듬 패턴에 사골 장터의 떠들썩한 타령 장단을 입혔으며,기름기 흐르는 일렉트릭 기타의 굉음 속에 명백히 가야금의 섬세한 미음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새로운 기타의 음색을 퍼올렸다.
'나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숨어흐르는 '흥'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인 벤딩(주어진 음을 상행 혹은 하행시켰다가 다시 돌아오는 주법)을 만들고자 했다. '미인'은 7인조의 구성으로 서울 장충동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구상한 것으로,쉬는 시간을 쪼개 그 중의 세 명만 추려 6개월 동안 합숙 연습을 한 결과물 중의 하나이다. 록은 달콤한 음악이 아니며 파격적인 노래말과 음악적인 대담성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의욕으로 불탔던 때가 아니었을까?'
그는 세계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언어로 자리잡은 서구의 록 음악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닌,그들의 악기와 편성을 가져오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한국적인 울림이 가능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70년대의 대학가 청년문화에서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서구 동경의 콤플렉스를 음악 그 자체에서 풀고자 했다. 즉,청년 지식인 문화에서 김민기가 서구의 진보적 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아침이슬'을 내놓았다면 고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신중현은 머리가 아닌 가슴의 '음악적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실이 바로 74년의 3인조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의 데뷔 앨범이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대중문화에 의해 지배되었던 이십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종속성의 굴레를 우리의 전통적인 해학과 비장의 미학으로 일거에 끊어버린다.
그러나 이 타오르는 극점은 동시에 몰락의 전주곡이 되었다. 당시의 유신 권력은 국책적 '건전가요' 작곡의 의뢰를 거부한 이 '늙은' 록커를 '대마초 왕초'로 몰아 모든 음악 활동을 금지하는 야만적인 조치를 취한다. 75년의 이 '가요규제 조치'로 인해 신중현을 위시한 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들은 거의 활동금지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 순간은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의 독립이라는 싹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