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갱상도 보리문디'와 한센인
/이원규 시인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모처럼 가족들과 어울려 바다와 산과 계곡을 찾거나 고향으로 간다. 특히 '전라도 깽깽이''갱상도 보리문디'들이 휴가철에 고향을 더 많이 찾는 것 같다. 효자효녀들이어서일까,귀소본능이 강해서일까,아니면 "우리가 남이가" 하는 패거리 문화 때문일까.
어쨌든 전라도 사람들이 무심코 경상도 사람들을 두고 '갱상도 보리문디'라 부르거나,경상도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두고 '전라도 깽깽이'이라고 부르는 저간에는 약간의 비하가 스며있다. 하지만 경상도 사람들끼리 혹은 전라도 사람들끼리 그렇게 부를 때는 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친밀감으로 돌변한다.
모처럼 경상도 출신의 고향 친구나 동창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게 내뱉는 말이 '문디자식' 아니면 '문디가시나'다. 친밀감의 표현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쌀도 아닌 '보리'요,나병환자를 비하하는 '문둥이'인가.
'보리문디'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라도보다 상대적으로 곡창지대가 적은 경상도에는 보리가 많이 났으니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가난의 의미요,그 가난을 뛰어넘기 위해 공부를 하는 아이들(文童),즉 보리 먹고 출세 공부하는 아이들이 '보리 문동'이었던 것이다. 그 '보리 문동'이 '보리 문둥이'로 격하되다 '보리 문디'로 이어져 왔다는 얘기도 있고,'보리를 먹으며 공부하는 동쪽 사람들'이라는 뜻의 '보리 문동인(文東人)'이라는 설도 있다.
설이야 어찌됐든 쌀도 아닌 가난의 상징 '보리'요,나병환자를 뜻하는 '문디'의 합성어로 널리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이 '갱상도 보리문디'나 '문디자식' '문디가시나'가 친밀의 표현이든 비하의 표현이든 그 문제 이전에 사실은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나환자' 혹은 '문둥이'로 불리며 일생을 천대받거나 편견에 시달려온 한센병 병력자들,'한센인'들이 바로 그 피해의 당사자들이다. 요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한센인들의 인권침해 문제를 풀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으며,그저 한때 일종의 병을 앓았던 병력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겨우 20여명 미만의 신환자가 발생하는데,그마저 리팜피신이라는 약을 네 알 정도만 복용하면 전염력이 완벽하게 사라질 정도로 전염력이 가장 약한 병이며,이 병은 또 유전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때처럼 한센인들은 여전히 소록도나 정착촌 등에서 격리되듯이 살고 있으며,지독한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보니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침해와 편견의 진원지로 경상도가 지목될 소지가 크다. '갱상도 보리문디'라는 말 하나에도 비하와 친밀감이 교차하지만,한센인들의 입장까지 고려한다면 실로 말 하나의 지독한 편견까지 보태져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실로 놀라울 정도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센병을 앓았던 한하운 시인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의 비애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센인들의 아픔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친일파 시인 서정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문둥이'를 읽어보면 그 심각한 편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이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짧은 시는 얼핏 한센인들의 애환을 그들의 입장에서 쓴 것 같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 '애기 하나 먹고'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애기 간을 빼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극히 왜곡적인 속설이 바로 한센인들을 바라보는 편견의 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1936년에 발표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일제가 한센인들에게 저지른 '아예 씨를 말리거나 소록도 등에 감금시킨' 비인간적인 정책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주의 시 '문둥이'가 한센인들의 치욕이 아니라 명작으로 대접받고,'갱상도 보리문디'가 친밀감의 문화적 대명사로 불려지는 현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니 늦어도 너무 많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