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보내기전 종가 잠시 모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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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주인공 정문부장군 13대 종손 정규섭씨

"북한에 가기 전 공적비를 진주 종가에 잠시라도 모셨으면 좋겠는데…. 욕심이겠죠."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가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세워진 북관대첩비가 마침내 20일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북관대첩비를 맞는 농포 정문부의 13대 종손 정규섭(78·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진주향교 전교)씨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백년동안 종가를 이어온 해주정씨 농포공파의 직계 종손인 정씨는 "이미 30여년 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이 비의 반환을 요구해왔으나 성사되지 못했는데 다행히 이번에 남북한 당국과 불교계 등의 끈질긴 노력과 협상으로 이 일이 이뤄져 감개무량하다"면서 "반환운동에 참여해준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진주향교의 총책임자인 전교직를 맡고 있는 정씨는 현재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서 농포 정문부를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와 부조전을 지키며 아직도 매년 농포의 기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유교 제례상 4대조(고조) 이상은 매년 기일에 제사를 모시지 않지만 국가에 현저한 공적을 남긴 선조에 대해서는 대 수에 관계없이 부조전(부조묘)을 만들어 매년 기제사를 지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북한 함경도 길주 주변에서 젊은 나이(당시 28세)에 의병들과 함께 왜군을 크게 무찌르면서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이 된 농포 정문부의 직계후손들이 경남 진주시 주변에 정주하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

당시 서울에 살다 27세때 북평사라는 외직책을 맡아 함경도에 부임했던 정문부는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당시 와병으로 난을 평정할 도원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쓰고 역모로 몰려 억울하게 옥사했다.

이때문에 정문부는 옥중에서 슬하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인심과 지형이 순후한 남쪽의 진주지방으로 가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후 해주정씨 농포공파 후손들은 진주시 옥봉 일대는 물론 대평면,귀곡동(까꼬실),이반성면 일대 등으로 퍼져 현재 진주 일대에만 2천여 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정씨는 전했다.

정씨는 "이제 마지막 바램이 있다면 북관대첩비 원본은 북한의 제자리로 돌아가더라도 복제비를 2개 만들어 하나는 중앙박물관에,하나는 농포의 사당인 진주 충의사에 안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선규기자 sunq17@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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