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요산 김정한] ①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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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작가'에 가려진 '인간적 면모'를 본다

반골 기질의 저항작가라는 판에 박힌 요산의 이미지보다는 어묵을 먹는 요산의 한 장 사진에서 박제되지 않은 인간 요산을 만난다. 사진제공=요산문학관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들려준 일화 하나.

"1971년 2월이었을 거예요. 요산 선생의 둘째 사위인 장정호 씨가 서울에 요산 선생이 오신다 해서 여자도 나오는 고급 술집에서 양주 대접을 했지요. 다들 막걸리나 소주 먹던 시절이라 양주 먹는 게 저도 난생 처음이었어요. 요산 선생은 게다가 제 아버지와 동갑이었어요. 그때 요산 선생이 제게 물어보셨어요. '여자 옆에 앉혀 놓고 술 마셔 봤나?'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에끼! 돌아앉아 술 먹어라'면서 껄껄 웃으시더군요. 너 같이 순진한 놈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거죠. 남자라면 통크게 마셔야 한다는 거예요."

대쪽 같은 이미지로만 각인된 요산이었으니 염무웅에게 그날의 술자리는 충격적이었다. "요산하면 민중이나 마시는 막걸리나 마실 것 같았거든요. 꿋꿋하게 자세를 지켜나가면서도 편협하지 않은 요산의 모습을 봤어요."

요산 김정한은 격변기를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올곧은 작가다. '대짝대기'라는 별명(소설가 최해군의 구술)처럼 작품을 압도하는 강직한 삶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그의 대쪽 같은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요산의 소설 '산거족'의 한 구절은 요산의 삶과 겹쳐지면서 서늘한 죽비가 됐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

59세의 작가가 25년의 절필 기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발표한 '모래톱이야기'(1966년)는 요산의 삶과 문학적 입지를 반골 기질의 저항작가로 우뚝 세우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단절된 카프 전통의 복원이란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25년의 절필 기간에도 요산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소설가 조갑상이 소설 작품 목록을 정리하면서 공백기로 알려진 25년 동안 12편의 소설과 1편의 희곡을 창작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절필 담론은 여전히 요산을 규정하는 핵심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엔 요산 스스로가 만들어낸 담론들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요산 스스로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라면서 절필 담론을 부각시켰고, "유년 시절부터 불의에 대한 저항-반골벽이 싹트기 시작했다"며 소싯적부터의 반골 기질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요산은 삶의 몇몇 대목에선 침묵하거나 사실과 다른 기억들을 쏟아 냈다. 요산 사후 친일 논란이 불거졌던 희곡 '인가지'에 대해서 생전 요산은 침묵했고, 도쿄 유학 시절 이찬의 권유로 조선인유학생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관여했다고 여러 수필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실상 학지광 편집위원에서 요산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간에서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인용을 거듭하면서 반골 인생을 살아온 저항작가라는 고정적인 인식은 확대재생산됐다.

요산의 장남 김남재는 말년의 요산을 이렇게 기억한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매일 저녁이면 노랫소리가 나와. 와세다대학 교가하고 응원가하고 총장 훈시였어. 작은 테이프를 밤낮으로 꽂아 놓고 매일 트는 거야. 교가도 따라 부르고. 그때가 그립나봐." 요산이 막연히 일본에 적대적일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을 뒤엎는 증언이다.

요산문학관에 보관돼 있는 미발표 수필인 '내 인생 내 문학'이란 글에서 요산은 '나는 분해서 그 뒤에 또 불교(구두쇠노승)에 대한 소설 한 편 더 같은 조선일보사에 발표하였다. 이번에는 중들도 진절머리가 났던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썼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인 '사하촌'이 사찰을 비방한 반종교적인 소설이라며 불교청년단원들로부터 테러를 당하자, 그런 식으로 분을 풀었다는 고백이다. 한없이 올곧아보이기만 하는 요산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이다.

요산이 스스로 습작이라 불렀던 20대 초반에 썼던 초기 시편들은 평론가 이순욱의 견해를 빌리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감상적이다. 이순욱은 "소설 사하촌에서 엿보이는 비판과 저항의 현실감각을 찾아볼 수 없어 당혹스럽다"고 했다. 문학청년 시절의 면모가 드러나는 30편의 시는 실존적 개인이 커가는 성장통일 터.

자칫 저항작가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 이런저런 요산의 인간적인 모습들은 그동안 논의에서 배제돼 있었다. 유년시절의 일화조차 60년대에 형성된 저항작가라는 평면적인 틀에 맞춰 취사선택되거나 부풀려져 왔다. 그래서 염무웅은 "요산에 대한 연구가 신앙화되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다소간의 흠결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 요산을 그리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민중들의 핍진한 삶에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보였던 요산의 삶과 작품이 부정되는 것은 아닐 터. 오는 24일은 요산의 100번째 생일이다. 때론 생생하고 격정적인 구술로, 때론 냉정하고 건조한 문서로, 때론 자전적인 소설과 수상록으로 재구성된 인간 요산의 이야기를 10회의 시리즈로 풀어낼 작정이다.

요산이 죽어야 요산이 산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ilbo.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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