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② 학창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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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보 때 학생 괴롭히던 박물교사 축출 참여

"김일손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냥 양반이어서가 아니라 사화에 연루돼 후손들이 쫓겨다녀야 했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말씀 하셨어요."

지난 1993년 요산을 인터뷰했던 문학평론가 최원식의 기억이다. 김해 김씨인 요산 김정한의 16대조가 바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죽임을 당했던 탁영 김일손이다.

김일손에 대한 자부심과 정반대로 요산에게 나쁜 기억을 가져다준 집안 어른이 있었다. 바로 대처승이었던 넷째 할아버지 송허당이다. 여섯 살 때부터 요산은 당시 '절할배'로 불렸던 송허당의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

"절할배가 서당을 했는데, 그 절할배 손자와 같이 서당을 다녔대. 3년이나 늦게 아버지가 서당에 갔는데도, 몇 개월만에 수준이 같아졌어. 진도를 더 나가자고 해도, 안 나가고. 한 번은 아버지한테 매질도 했다는 거야. 밑글을 못 외웠나봐. 종조부 손자였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는데 피나게 맞았다고 해. 어린 마음에 억울했던 거야. 더 배울 게 없다 해서 서당을 때려치웠대. 그래서 할아버지가 동래장에 가서 현토통감이란 책을 사줘서 혼자 공부했다는 거야." 장남 김남재의 회고다. 요산도 '반골인생'이란 글에서 '그때의 일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불의에 대한 저항-반골벽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절할배에 대한 기억은 일제강점기 몇몇 타락했던 승려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요산의 사촌동생 김재한은 "절할배가 범어사 밑에서 물레방아를 운영했다 하대. 시주 받은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장기쌀 놓고 물레방아 돌려서 돈 번 야문 어른이랬어"라고 전했다. 요산이 1940년에 쓴 단편 '추산당과 곁사람들'에 묘사된 '재물만 알고 허욕에만 철저하던' 추산당은 마치 절할배를 모델로 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불도를 배우기는커녕, 부처 불자도 모르고서 그만 또 이내 바랑을 지고 동냥질을 다녔지-'동냥 왔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십여 년 해서 논도 사고 돈도 모았지'라고 묘사한 치부 과정 말이다.

1919년 범어사 명정학교를 거쳐 1923년 서울 중앙고보로 진학했던 요산은 '손장난' 때문에 1년6개월 만에 낙향해야 했다.

"아버지가 하숙을 하다가 상급생 놀음판서 돈을 몽땅 잃어버린거야. 그런데 아버지가 등록금이 올랐다고 거짓말을 했고. 할아버지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았던 거지. 할아버지가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데리고 내려왔어. 나중에 아버지가 그때 참 내가 바보짓했다고 자주 이야기 하셨지." (김남재 구술)

그렇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24년 9월 동래고보로 전학을 온 요산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학생들의 스트라이크였다. 요산문학관에 소장돼 있는 미공개원고 '내 인생 내 문학'에는 동래고보 시절 학생들을 괴롭히던 박물 교사를 내쫓았던 일화가 나온다.

'가을운동회가 있던 날, 점심시간이었다. 운동회 역원일을 맡아 보던 우리 상급생 몇 사람이 점심도시락을 준비해오지 못했기 때문에 점심 노는 시간에 학교 정문 밖 가까이에 있는 중국 호떡집에 갔더랬는데, 늙은 박물 교사가 박물 전용 교실에서 망원경을 통해서 그 학생들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각 학급 사진첩을 꺼내 해당 학생들의 얼굴 사진에 'X'표를 시커멓게 그어 놓고서 풍기를 문란케 하는 놈들이라 해 운동회가 끝나면 처벌을 하겠다고 을렀다. 나도 얼굴사진에 'X'표가 그어진 한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인권유린이라며 거칠게 항의했더랬다. '박물 교실에 망원경을 비치한 것은 도둑이나 간첩을 추적하듯 학생들을 감시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우리들은 학생들의 인권을 모독하는데 쓰라고 박물 교실에 망원경을 비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박물 교사는 신의주고보로 쫓겨 갔다.

수업시간에 일본을 '내지'라고 하던 한국인 교사를 '내지라니 충청북도 말입니까?'하고 봉변을 줬던 일도 그즈음이었다.

동래고보는 당시 반일 사상이 거센 학교였고, 거의 매년 동맹휴업을 벌였다. 동맹휴업에 참가했던 요산도 동래고보 3학년이던 1925년 7월 11일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같은 달 정학이 풀렸다.

하지만 요산은 앞에 나서서 동맹휴업을 주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요산 스스로도 '식민지 청년으로서 민족해방을 위한 비밀결사 같은데 들어가 계속 일을 해 볼 용기가 모자랐기 때문에 문학에 기울어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동래고등학교 80년사(1978년)'에는 '그때 전교생 281명 가운데 234명이 정학처분을 당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학생은 노골적인 반항을 했다가 또 다시 퇴학을 당했고, 전학 또는 자퇴자도 속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산이 '나는 상급생들의 권유와 지시에 따라 거사 때마다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피하는 학생들을 민족을 배반하는 자들이라 해서 스파이 혹 바크테리아라고 규탄하였다'고 회고할 정도로 동맹휴업은 일상이었다.

요컨대 요산만의 특별한 경험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 내야 하는 의식있는 젊은이들이라면 응당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마치 80년대를 지나온 대학생들치고 운동권 아니었던 이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상헌 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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