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③ 일본 유학 시절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월북 문인들과 교류 사회주의 세계관 접해

일본 와세다대학 정문에서 소다이(早大) 길을 따라 우측 4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쓰루마키미나미(鶴卷南)공원을 만난다.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와세다대학 명예교수가 공원 앞 아담한 3층 건물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쓰루마키거리(鶴卷町) 509번지 바로 여기에요. 요산 선생이 마지막으로 하숙을 했던 곳이에요. 그때는 여기 일대가 죄다 하숙촌이었어요." 그가 건내준 학적부에는 자주 하숙을 옮겼던 요산의 이력이 나와있다. 모두 여섯 번이다.

요산의 하숙집서 불과 10m 떨어진 곳에 '카이호우샤(解放社)'라는 출판사가 있다. 일본 혁명적 마르크스 그룹인 '가쿠마루'파(革マ-ル派) 본부다. 직책을 밝히길 한사코 꺼린 하마다 씨는 "우린 스탈린주의 말고 진짜 사회주의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미핵항모 입항반대 시위 사진에선 와세다대학 깃발이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다음 골목에는 송기숙의 '광주의 5월'과 고은 '시선집'을 출판한 후지와라서점(藤原書店)도 있었다. 세월은 요산이 있던 하숙집의 풍경을 지워버렸지만, 와세다대학 앞은 여전히 운동권들의 아지트였다.

요산이 밟았을 길을 걸으며 80여년 전으로 돌아갔다.

요산은 1929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울산대현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조선인 교원들의 차별에 반대해 각지에 편지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경찰에 잡혔던 일이 빌미가 됐다.

한데, 1930년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 문학부에 입학하기 전 1년간의 행적에 착오가 있다. 1938년에 쓴 '자서소전'에선 '와세다 예과에 낙제해서 1년간 동경에서 어름어름' 보냈다고 적었다. 그 뒤에 또 다른 수필과 인터뷰에선 '게이오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부잣집 자손들이 다니는 데라서 기질이 맞지 않아 와세다로 옮겼다'고 몇 차례 회고했다. 반골기질을 강조하면서 생긴 착오지 싶다.

하여튼, '동지적인 조직으로서 주로 사회과학 방면의 공부와 토론을 하는 것이 목적'인 독서회에도 가입하는 등 요산에게 와세다 시절은 평생을 좌우할 세계관을 학습한 시기였다.

'내가 들어간 곳은 문과였지만 교과과정표를 보니 문학에 관한 것은 적고 심지어 천문학 같은 것까지 들어있지 않은가. 태양의 흑점이니 뭐니 하는 건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다. 계단식으로 뒤가 높아진 과학 교실 뒷자리에 앉았다가 교수가 안보는 사이에 뒷창문을 뛰어내려 도망친 일도 있었다. 나는 사회과학에 관한 강의와 영문학에 관한 일주일에 한 시간 밖에 안되는 강의만 열심히 들어갔다.'(요산문학관 소장 미발표원고 '내 인생 내 문학') 오무라 교수가 보여준 성적표가 요산의 회고를 증명했다. 2학년 때 전체 평균 성적이 70점이었는데 자연과학은 64점에 불과했고 대신 작문은 83점을 받았다. 영어와 역사 성적도 괜찮았다.

요산은 안막(법학과·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이찬(영어과) 등 같은 대학 1년 선배와 호세이 대학 이원조(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와 막역했다. 1931년 11월, 2학년 때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하던 '동지사'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동지사엔 언양 출신 신고송, 밀양 출신 박석정이 함께 명단에 올라가 있다. 공교롭게도 언급된 다섯 명은 죄다 해방 뒤에 월북한 문인들이다. 김응교 와세다대 교수는 "'마르크스, 엥겔스를 비롯하여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 루나찰스키 할 것 없이 마구 닥치는대로 읽었다'는 당시 유학생의 글을 통해 어느 정도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요산도 사회주의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낭만을 만끽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했고 클래식 레코드도 사 모았다. 최승희와 연애하던 안막이 피임약을 사려고 요산의 레코드를 죄 팔아버렸다고 요산은 생전에 평론가 최원식에게 말했었다.

짜릿한 연애담도 있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같은 유학생이었소. 이역 땅 한 하숙집에서 한국 사람이라고는 단 둘이 있자니 자연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내 방에 자주 들렀고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됐소. 한 해 여름 방학 때 고향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 가운데는 그와의 관계도 물론 있었소.' 훗날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요산의 회고다.

유학은 3학년 1학기로 끝나고 만다. 양산농민조합사건이 결정적이다. '여름 방학에 귀국했다가 때마침 일어났던 양산 농조의 경찰 습격 사건이 경찰의 야만적인 보복 행위로 바뀔 무렵 '심퍼' 사업에 가담하여 지방 순회 공작 중 해방 후 죽은 박인호 김세용 두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동기가 됐다.'

회고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 장남 김남재의 구술이다. "절할배가 할아버지에게 '저놈 저거 공부 시키면 안된다'고 했대. 절할배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마음에 드는 공부를 안했다는 거지." 요산의 유학 비용을 댄 건 절할배(송허당)였다. 와세다대학 학적부에는 '1932년 9월 26일 학비 미납 제적'으로 기재돼 있다.

요산은 이 일이 '내 일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고 했다. 요산이 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한다.

도쿄=이상헌 기자 tto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