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요산 김정한] ④ 남해 교사 시절
작가 · 가장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
'다시 설 곳이 없는 꼴이 되자 어떤 관청 요직에 있는 친척에게 소학교사직을 탄원했었다. 재차 편지를 내었더니 남해 학교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남해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 아닙니까?" 흔쾌치 않은 답서를 보냈었다. "섬이면 어때?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고대소설을 발표한 유복자 김만중 씨도 남해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자네도 문학을 해보겠다는 사람이니까 귀양가는 셈 치고 거기가서 훌륭한 소설이라도 한번 써 보게나!"'(미발표 원고 '내 인생 내 문학')
내키지 않은 자리였지만 요산은 1933년 9월 남해공립보통학교에 발령이 나서 1940년 남명공립보통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남해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남해란 섬에서 보통학교 교원 노릇을 하던 칠년 동안의 생활이 비록 이 집 저 집 셋방살이를 했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비교적 평온했던 시절이었소. 혼례를 치른 지 팔년 만에 우리는 비로소 옳은 동거 생활을 시작했고, 거기서 애를 셋이나 낳았잖소. 내가 끄적거린 사하촌이란 작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도 그 무렵이었고, 교원 생활을 해 가면서 몇 편의 작품을 발표하는 걸 보고 이녁은 은근히 나보다 더 어떤 꿈, 어쩜 남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가졌었을지도 모르겠소. 적은 월급이지만 가끔 원고료를 보태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게라는….'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요산은 그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했다.
'사하촌'으로 처음 문단에 이름을 알린 요산은 남해 시절 '옥심이', '항진기', '기로' 등 7편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호사다마라. '사하촌'으로 요산은 몇 차례 낭패를 당했다. 범어사에서 절을 욕되게 한다고 발끈했던 것. '니가 무슨 글을 썼기에 범어사 불교 청년단이란 땡추들이 기고만장해가지고 떠들고 다니냐'는 아버지의 엽서가 오고, 경남도청에서도 조사를 해갔다. 이듬해 봄방학 땐 동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범어사청년단으로 추정되는 괴청년들에게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상금은 약값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장남 김남재는 "아버지가 절을 싫어하셨어. 맨날 순사와서 밀주단속하는데 절에선 '천황폐하 성수만세(天皇陛下 聖壽萬歲)' 한다고. 옛날 왜정시대 절은 절도 아니라고 하셨지"라고 했다.
불 같은 성격은 감출 수 없었다. 한번은 남해 읍내 신사 주위의 벚나무에서 버찌를 따던 애들이 표독스런 일본인 산림주사에게 붙들려 해가 지도록 벚나무 밑둥치에 묶여 있었다. 그 이듬해 봄, 산림주사를 우연찮게 술자리서 만났다. 요산은 산림주사의 눈을 손으로 찍었다. 단편 '회나뭇골 사람들'에도 그 일화가 나온다. '세 소년은 마치 일본 귀신에게 바쳐진 제물처럼, 신사 앞 벚나무에 따로 따로 동여매여 있었다.' 소설가 조갑상과 함께 둘러본 '회나뭇골 사람들'의 무대에서 요산 소설의 리얼리즘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말 사전과 식물도감을 손수 만든 것도 리얼리스트 요산답다.
"이름모를 꽃, 이름모를 새, 이런 식으로 쓰면 크게 야단을 치셨지요. 작가는 꽃이름 풀이름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고." 요산 선생의 자택에서 대학원 수업을 받았던 이해웅 시인의 말이다. 요산문학관에는 남해 시절 혼자 힘으로 만든 8권의 우리말 노트와 2권의 향토식물조사록, 문학용어사전이라 명명한 자료철이 남아 있다. 서랍 하나를 빼어 보니 '연료'란 항목이 보였다. 가다귀(잔가지로 된 땔나무)부터 가리, 솔가리, 가리나무, 검댕, 검부나무, 검부저기, 검부잿불, 검불, 꽃불, 나무새, 냉피리까지 일목요연하게 낱말카드가 정리돼 있었다. 식물을 직접 채집해 모양과 이름, 생태를 적고, 생김새도 세밀하게 그려넣은 향토식물조사록에선 문학청년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주말에는 식물채집한다고 혼자서 깊은 산에 돌아다니셨대. 방안에는 도감을 만든다고 모아둔 풀잎사귀가 잔뜩 쌓여있었지. 그게 정말 행복하셨나봐." 장남 김남재의 말이다.
소설전집 출간을 맡은 조갑상은 요산의 어휘 사용에 새삼 놀랐다. "'지옥변'에 '총냥이'란 말이 나와요. 뒤에 출판사에서 없는 말이라며 '승냥이'로 고쳤어요. 그런데 찾아 보니 총냥이는 '여우나 이리 따위처럼 눈이 툭 불거지고 입이 뾰족하며 얼굴이 마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어요."
우리말에 대한 사랑은 남해 시절 제자들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다. 요산이 남명보통학교 3학년을 맡았을 때 급장을 했다는 김경수 옹. 여든의 나이에도 70년 전 일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음악하고 체육은 거의 안 했지. 수공 시간이라고 있었는데, 종이접기 같은 거 만들어라 해놓고 그 시간에 늘 글을 쓰셨지. 조선어만큼은 야무지게 배웠지. 교수 용어는 꼭 왜말을 쓰게 돼 있었는데, 정한이 선생님은 조선어 시간이 아니라도 조선말을 많이 사용하셨지. 다른 선생들과는 거꾸로라. 우리말 틀린 건 바로 고쳐주시는데, 왜말 발음은 틀려도 지적도 안하셨어. 조선어 작문은 분명히 했는데, 일본어 작문은 별 기억이 안나."
조선어가 학교에서 사라지면서 요산도 남해 교사 시절을 마감했다. "우리 한테는 치질이 있어서 더 이상 선생 노릇을 못한다고 둘러대셨지." 김 옹의 말이다. 이상헌 기자 tt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