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⑤ 일제말과 해방정국
안정된 생활 속 식민지 지식인 자괴감 표출
'내가 노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부터 겨우 서너 달 전이었다. 그건 K도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실이었다. "지금까진 뭘하구 계셨소?" 인정이 소복소복 담긴 듯한 얼골에 자연스런 미소를 띠우며 물었을 때 어쩐지 나는 선듯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며칠 전 부청을 그만둔 친구입니다." 나를 소개하던 강군이 대신 대답해 줄 때 나는 다소 마음이 가뜬해졌다.'
요산 김정한이 1946년 3월 '전선' 창간호에 쓴 단편 '옥중회갑'의 첫 단락이다. K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등장하는 '노선생'은 조선공산당 경남도책을 지낸 김해 출신 좌파혁명가 노백용. 요산이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문화부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처음 노백용을 만난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짧은 체험적 소설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1940년대 요산의 삶을 해명할 열쇠가 숨어 있다.
남해교사 시절을 뒤로 한 요산은 1940년 3월 동아일보 동래지국장을 맡았다. 그해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요산은 11월부터 경남도청 상공과 산하 민간물자통제단체인 경남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조합장은 일본인 도청 상공과장이었다. "면포조합 다닐 때 늘 충무동서 낚시로 소일하셨지"라는 장남 김남재의 증언처럼 마뜩지 않은 자리였을 터. 하지만 "전시총동원체제에서, 그것도 핵심지배기구의 직원으로 공직에서 일하게 됨으로써 다른 계층과 다른 특별한 자리와 혜택을 보장받았고, 적어도 개인적 위해나 손해를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지니게 됐다"는 박태일 경남대 교수의 평가처럼 식민지 체제 속에서 안정된 생활은 영위할 수 있었다. 자의는 아니더라도 요산은 카나야(金谷)로 창씨개명도 한 터였다.
그렇게 해방을 맞은 요산이 스물 네 살 위인 좌익혁명가 노백용을 소개받은 것.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노 지도자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한편 요산 자신의 부끄러운 전력에 대한 자책감이나 고민의 목소리를 은밀하고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도 그런 정황 때문이다. 요산은 '옥중회갑'의 후일담으로 '설날'(1947년 6월 '문학비평' 창간호)이란 단편에서 10월 인민항쟁으로 투옥된 노백용 집안의 의연한 대처를 다뤄 인민을 계몽하는 선전문학에도 발을 담갔다.
'옥중회갑'이나 '설날'과 정반대에 위치한 작품이 있다. 경남면포조합 서기 시절에 쓴 희곡 '인가지'. 요산 생전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던 '인가지'는 박태일이 몇 년 전 '부왜작품'이라 주장하면서 논란이 됐다. 1943년 친일매체 '춘추' 9월호에 실린 '인가지'는 지원병으로 나가는 개동과 그 이웃의 혼담을 담은 희곡. 박태일은 "성전에 나갈 지원병과 그 가족을 이웃이 힘껏 도와주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데 전체 맥락이 맞춰져 있는 전형적인 국책극"이라 했다.
해석은 열려 있다. "인가지는 분명 요산 일생의 얼룩이라고 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걸로 친일이다 하는 건 지나치다고 봐요. 물론 엄격한 기준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 목숨을 내걸고 일제와 싸운 사람들의 기준에 비춰본다면 용납할 수 없겠지만. 요산은 항일 전사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생활세계를 살면서 그걸 문학작품으로 옮긴 생활인이자 비판적 지식인인거죠." 평론가 염무웅의 말이다.
요산의 죄책감을 덜어준 이가 '옥중회갑' 속의 '강군'. 요산을 노백용에게 소개시켜준 '강군'은 강대홍이다. 요산이 훗날 '의협심이 강하고 항일기개가 남달랐으며, 투사형이면서도 리더십이 있었던' 인물로 기억했던 이다. 강대홍은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 사건으로 체포돼 3년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당시 신문에서 옥중의 강대홍이 위중하다는 기사와 출옥 뒤의 근황까지 소개할 정도로 지명도가 있었다. 요산은 동아일보 동래지국장 시절 부산지국장이던 강대홍과 인연을 맺었다. "동아일보 부산지국장 하면서 광복동에서 제일다방(뒤에 에덴다방으로 이름을 바꿈)을 했는데, 주위에 조선 사람이 경영하던 다방은 강대홍 씨 것밖에 없었어"라는 소설가 최해군의 말처럼 다방에서 자주 만나 의기투합했을 테다. '옥중회갑'을 발표할 즈음 요산은 조선문화단체총연맹 부산지부장, 강대홍은 남로당 부산시당 위원장이었다.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는 강대홍의 장남 강세규(71)를 어렵사리 만났다. 얄궂은 인연이 있었다. "남재(요산 장남)하고 부산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짝이었어. 우리집에도 놀러 오곤 했지. 내 큰누님(영희)하고 남재 큰누님(복선)도 경남여고 동창이었대. 학교 다닐 때는 남재 아버지가 요산 선생인 줄은 전혀 몰랐어. 한참 뒤에 사회생활하다가 어머니가 말씀을 해줘 알게 됐지."
그나마 연좌제에는 걸리지 않아 자식들은 무사했단다. "호적에는 강대홍이 아니라 강대락으로 돼 있어. 치안유지법으로 재판받을 때 진술한 주소도 엉터리야. 이름도 주소도 엉터리니 호적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지. 아버지는 6·25 전쟁 직후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51년 3월 형무소에서 나돌던 발진디푸스에 걸려 병사했다는 말을 들었어."
요산은 일제말과 해방정국의 혼란스런 한때를 함께했던 친구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부모의 마음을 졸이게 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나라 위해 한몸을 바칠 만큼 용기가 없었던" 식민지 생활인의 자괴감에 사로잡힌 채.
이상헌 기자 tto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