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⑥ 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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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 죽을 고비 넘겨

'고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것도 미리 각오한 바였다. 때리고, 차고, 쑤시고, 물을 먹이고…… 그러다간 단념을 했는지, 지친 탓인지 '굴뚝시험'이라는 장난까지 하였다. '굴뚝시험'이란 긴 신문지를 길게 말아서 두 콧구멍에 굴뚝처럼 꽂아 두고, 그 끝에 불을 붙여 연기가 코로 들어가게 하는 고문이다. 눈알이 빠지는 것 같고 코끝이 타다가 정신이 나가버린다. 생각할 수 있는 갖은 방법으로 인간의 육체를 괴롭히고 놀리는데 생의 보람과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요산이 '일본 헌병 앞잡이의 부하들에게 잡혀'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던 시절을 회고한 글이다.

요산은 울산대현보통학교 교원 시절이던 1928년 11월 일본인과 한국인 교사의 차등 대우에 '화가 잔뜩 나서 각처로 엽서를 보낸' 것이 문제가 돼 처음 유치장에 갇혔다. 이후 1932년 양산농민조합 관련 사건으로, 1940년 동아일보 동래지국장 시절 구독료 독려차 독자들과 만났다가 불법집회란 이유로 피검되는 등 여러 차례 감방 신세를 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의 옥중 생활을 마지막으로 감방 신세는 더 이상 지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요시찰 인물로 찍혀 늘 사찰의 대상이 됐었다.

가장 큰 시련은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8개월 가량 형무소 생활을 했을 때.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당국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처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캄캄한 형무소 뜰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워졌다. 그의 얼굴에 강한 플래시 불빛이 비쳤다. 그 순간 그 불빛의 주인은 "선생님 웬일이십니까?"라고 소리치더니 그를 감방으로 돌려 보냈다. 감방에서는 동료 수인들이 그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평론가 김종철과 대담에서) 그를 살려준 은인은 박태지. "남해보통학교 제자 중에 박태지라는 분이 있었어. 이 분이 어려울 때 아버지가 월사금을 대신 내줬대. 1950년에 부산형무소 교도관이었는데, 이 분 덕에 면회고 뭐고 덕을 많이 봤어. 그때만 해도 줄세워서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태지 씨가 아버지를 살려줬대. 큰 누님이 박태지 씨 부인을 아는데 부인이 그 이야기를 하더래. 아버지가 월사금 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8월 14일 이전에 잡혔으면 못 사셨을 거야. 8월 15일부터 군법재판소에서 민간재판소로 이관된 거야. 천운이야."(장남 김남재 구술)

가족들의 삶도 고단했다. "6·25 전쟁 난 다음날부터 아버지가 엄궁에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소재를 대라며 육군특무대에서 누님하고 어머니를 잡아갔어. 아버진 8월 15일에 연행됐지. 아버지가 그렇게 들어가고 나니까 우리 7남매 먹고 살 게 아무 것도 없었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장사' 했지. 100매씩 떼다가 동광동 광복동 국제시장 보수동에서 팔았지. 모친은 밤에는 군복공장에 나가고 낮에는 행상을 했어. 첫 누님부터 셋째 여동생까지는 떡공장에 다녔어. 그런 생활을 8개월을 했지."(김남재 구술)

도망도 많이 다녔다. "48년 3학년 작문 수업 때였지. (요산은 47년부터 부산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공부시간에 밖을 보는데 교문에서 너댓 명이 들어오더라고. 내 눈에도 형사들 같았어. 선생님도 그걸 보시곤 그 길로 줄행랑을 치셨지." 당시 학생이었던 송영택 시인의 말이다. 김남재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48년쯤으로 기억하는데 경남도경 사찰과에서 지프차를 타고 나와 아버지 어디있냐고 하면서 휘발유를 내 입에다 먹이는 거야.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해. 그 형사 죽일 거라고 이름도 외고 있었는데…."

1961년 5·16 쿠데타 뒤엔 '황용주를 내각수반, 김정한을 문교장관으로 하는 내란 음모가 있다'는 투서로 도망 다녀야 했다. "5월 17일 밤에 집을 나가서 서울 이대 앞 하숙집에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 아는 학생이 있었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어 군산에 있는 병원으로 도피하셨대. 정신병동까지 옮겨가면서 고생하셨지. 여름 두 달 동안이나 도망 다니다 아는 분이 이젠 괜찮다고 자수를 종용해 8월 28일 자수했지. 자수할 때 나도 같이 갔었는데, 아버진 조서쓰고 한달 반 정도 있다가 개천절에 나왔어."(김남재 구술)

그런데 자전에세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알려진 요산의 수난사 중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투옥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 몇 있다. 수형자신분증, 판결문, 약식명령 등이 남아있는 국가기록원의 기록들 속에서 1925년부터 1963년까지 김정한이란 이름으로 검색을 해서 60여 건을 찾았는데, 본적과 한자가 요산과 동일한 사람은 없었다. 1946년 미군정에 끌려가 옥살이를 했노라는 증언과 달리 당시 신문에 실린 노백용 등 21명의 피검자 명단에서 요산은 보이지 않는다.

요산의 증언도 미심쩍은 구석들이 보인다. 이 글 첫머리에 인용했던 고문의 기억은 일제강점기 때 당한 고초로 읽혀지지만 '낙동강가 후미진 마을(엄궁)에서 오랫동안 피신살이를 하다 잡혔다'든지, 처와 자식들이 함께 끌려간 일이 서술된 정황을 살피면 1950년대 국민보도연맹 건일 가능성이 많다. 이 수필을 썼을 때가 1966년이고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발언이 1990년 이전에는 금기 사항이었으니, 이를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고 일제 때 수난사로 오인되게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의적인 왜곡이건 기억의 착란이건 간에 조심스레 살펴봐야 할 대목들이다. 이상헌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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