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⑦ 40년 '지우' 향파
기질 달랐지만 인간 중심 문학정신은 비슷
'향파와는 40여 년을 사귀어 온 사이다. 해방 직후(1947년) 그가 동래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부터다. 술자리뿐 아니라 서로 집에까지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동인지도 같이 내고 문인협회 같은 문학단체에도 같은 회원이 되었었다.'
1987년 향파 이주홍의 부음 소식에 요산이 쓴 글이다.
"향파 선생은 우리집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셨지. 54년부터 62년 무렵까지 주중엔 한 두번, 토요일은 으레 오셨어. 오후 4시나 되면 오셔서 밤 10시 정도까진 계셨지. 두부나 명태 같은 안주로 술을 일상처럼 드시더라고. 그때 방 셋에 칠남매가 살던 때니 가족들에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친 셈이지. 아버진 향파 선생 칭찬을 많이 하셨어. 그림도 잘 그리고 서예도 하고, 타고난 재주꾼이다고. 그러면 향파 선생은 아버지보고 너는 옹고집이다, 좀 연해져라, 이런 말씀 많이 하셨지."(장남 김남재 구술)
부산 문단의 두 거목은 40년을 함께한 '지음(知音)'이었다. 요산과 향파를 함께 만났던 소설가 최해군이 들려준 몇몇 일화들이 그걸 증명한다.
"작품 경향으로 보면 요산은 사회성이 강하고, 향파는 예술성이 강해서 둘 사이가 나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절대 아냐. 요산이 56년에 첫 창작집 '낙일홍'을 냈을 때도 안하려고 하는 걸 향파가 억지로 하게 했어. '낙일홍' 표지도 향파가 다 해줬어. 니 책 안내면 영원히 잊혀져 버린데이, 라면서 책 내라고 했대."
요산도 향파를 많이 챙겼다. '자유당정권 초기 때의 일이다. 부산시에서 문화상 제도를 처음 만들고 도당 문화부에서 어용성이 강한 문인협회 회원 한 사람을 후보자로 내세웠을 때, 나는 향파의 문학적 수준과 업적을 훨씬 높게 샀던 터라 부산문필가협회란 걸 만들어서 그 이름으로 그를 수상 후보자로 추천하여 자유당 도당 문화부와 맞섰다. 심사위원회가 열리자 반대 쪽에서 대뜸 향파의 사상 문제를 들고 나왔다. 턱도 없는 용공조작극이었다. 나는 시장 쪽을 바라보고, 생사람 잡는 이런 위원회에는 동참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퇴장을 해 버렸다.' 1957년 제1회 부산시문화상은 향파가 받았다.
"청마(유치환)가 나이는 요산과 같은데 고등학교 한 해 선배지. 요산이 청마를 동갑인데도 깍듯하게 모시는 거라. 향파는 두 살 위인데도 요산이 말을 탁 놓고 지냈거든. 저분들이 함께 자리에 앉으면 묘했어. 농담하는 걸로 치면 향파가 단수로 9단쯤 되고, 요산은 단수도 없어 늘 당했지." (최해군 구술)
그리 친했지만 참 많이 달랐다. 흔히 아동문학가로만 알려져 있는 향파는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중국 고전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장르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문학 외적으로도 연극 활동은 물론이고 서예로 일가를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 일제 말에는 만화가, 특히 문단만화로는 거의 독보적이었다. 팔방미인이었다. 반면 요산은 소설에만 집중했다. 한우물만 팠다. 자연히 향파와 요산의 작품 숫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향파가 많았다. 향파는 60년간의 창작 활동을 통해 90편의 소설을 비롯해 펴낸 책만 200여 권에 이른다. 사소하게는 술도 향파가 맥주만 즐겼고, 요산은 소주나 정종을 찾았다.
소설 작법에서도 평론가 김중하의 표현대로 향파가 현실 문제를 한발 물러서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요산은 드러내기와 꾸짖기, 극적 대립과 갈등, 직접 대응하기로 현실문제를 다뤘다. 평론가 김정자는 향파의 문체가 우수의 빛깔을 띤 수채화의 그림이라면 요산의 문체는 목탄화의 그림이라 했다.
흔히들 향파는 예술가적 기질, 요산은 운동가적 기질이 강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실은 묘하게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향파는 두메 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요산은 그래도 부유한 집안에서 컸다.
"요산은 현실참여적 작가니까 행동과 문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향파는 운동하고 정치하는 걸 싫어했어요. 왜 싫어했냐면 거꾸로 보면 될 겁니다. 향파의 살아온 삶이 일제시대에는 요산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었어요. 요산도 좌파적 작품을 많이 썼지만 좌익 조직의 일원은 아니었어요. 근데 향파는 서울에서 일찍부터 좌파 활동을 했어요. 1931년에 '불별'이라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동요집을 내는데, 일제시대 카프아동문학운동의 최고봉이거든요. 해방 직후에도 향파는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 맹원으로 참여했고, 만화 때문에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 위원장을 했지요."(평론가 류종렬 구술)
참 많이 달랐지만 서로 공유했던 경험들도 책으로 쓰자면 한 권 분량은 나온다. 동병상련이랄까?
요산과 향파 모두 해방을 집에서 맞지 못했다. 향파는 치안유지법에 걸려 검찰에 검거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요산은 강대홍의 귀띔으로 검거 직전에 몸을 피해 도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노익장을 보여줬다는 것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요산도 나이 육십이 다 되어서야 많이 썼어요. 향파도 좋은 소설은 그 무렵부터 많이 썼어요."(류종렬)
요산은 향파를 이리 기억한다. '향파와 나는 기질은 비록 달랐지만 40여 년을 서로 아껴 온 까닭은 인간을 소중히 여겨 온 문학정신이 같았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나는 찬바람이 부는 수산대학 교정에서 열린 그의 영결식장에서, 인간을 최후까지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은근한 문학정신을 기리며 그를 잃은 아쉬움을 금하지 못했다. 우리들을 겁 주지 않을 저승에서 편히 쉬라고.'
이상헌 기자 tto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