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⑧ 모래톱 이야기와 절필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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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세 때 '모래톱…' 발표 뒤 전성기 구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가는 요산 김정한. 단편 '모래톱 이야기'의 주인공 건우도 나룻배를 타고 조마이섬(을숙도)에서 통학을 했었다. 사진 제공=요산문학관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도,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산 김정한이 1966년 11월 59세의 나이에 발표한 '모래톱 이야기'의 프롤로그다.

조마이섬(을숙도)에서 나룻배로 통학하는 건우네의 딱한 사정이야기다. 선조 때부터 살아왔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일제시대엔 일본인, 해방 후엔 국회의원, 그 뒤엔 매립 허가를 받은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었다는 건우의 이야기에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요산도 1947년부터 부산중학교 교사로 재직했었다. 요산에게서 국어를 배웠던 허경(78). 부산중학교 5회인 그는 명지 출신이다. "홍수가 났다 하면 강물이 밀려 내려와 하류에 있던 을숙도 땅이 늘어났지. 들쑥날쑥해서 국가에서 3년에 한번씩 측량을 했어. 을숙도 살던 사람은 육지서 막노동을 하다 들어간 정말 없던 사람이었어."

"투박한 어투로 민중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모래톱 이야기'는 실존주의니 뭐니 하는 외국 문학의 영향에 사로잡힌 한국문단에 한방 먹이는 작품이었어요. 우리 의식 바깥에 있던 민중의 존재와 민족 현실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거죠. 박정희 정권의 압축적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민중 현실이 본격적인 문학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70년대 비평계의 쟁점인 민족문학론 형성 과정에서 작품으로 뒷받침을 한 분이 요산이죠."

1930년대 반짝 나타났다가 한동안 중앙문단에서 잊혀진, 그것도 환갑이 다 된 노 작가의 문단 복귀는 문학평론가 염무웅에겐 '충격'이었다. 문학사에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도 비슷한 말을 했다. "66년에 '창비'가 창간되면서 문단이 활기를 띠었다고 하지만 민중문학이라 부를만한 작품이 없었던 시대예요. 김지하나 황석영 같은 이도 정식 등단하기 전이고, 이문구 같은 작가도 갓 등단했을 무렵이고. 이런 상황에서 '모래톱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을 일으키는 문학적 근거를 제시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게다가 요산은 '모래톱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작품을 쏟아 낸다. '과정'(1967), '축생도'(1968), '수라도'(1969), '지옥변'(1970), '인간단지'(1970), '산거족'(1971), '사밧재'(1971)….

"원응서 선생이라고 황순원 선생하고 동향이고 그 또래인 분이 '문학'이란 문예지를 창간했는데, 그 분이 오래도록 붓을 꺾고 있는 원로들에게 집필을 권유했어요. '모래톱 이야기'에 나오듯이 따라지 인생들의 현실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버려진데 대해 당신이라도 발언해야겠다는 생각도 하던 참이었지요. 5·16 직후의 고초에서 조금 회복되던 때니까 붓을 들 수 있었기도 했겠지요. 사실 요산 선생에겐 그때부터 70년대 전반까지가 작가로서는 전성기지요." (백낙청)

요산은 회고담에서도 절필을 강조했다.

'오랜 절필 끝에 해방을 맞이했으나 해방이 된 뒤에도 붓이 들어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발행되던 대중신문, 민주신보 등에 논설, 잡문 따위를 끼적거리며 문화건설이란 조그마한 부정기 잡지도 내보았지만 소설만은 써지지 않았다.'(1973년 '허덕이다 보낸 인생')

그런데 요산은 '묵묵'한 적도 '절필'한 적도 없다. '인가지'(1943)를 비롯해 '옥중 회갑'(1946), '설날'(1947) '농촌세시기'(1954) 등 '25년의 절필'기간 동안 희곡 1편과 소설 12편을 발표했다. 그 와중에도 자전적 기록과 인터뷰를 통해 절필과 문단복귀 담론은 재생산되고 증폭됐다. '인가지'의 친일문제를 제기했던 박태일은 "요산의 절필담론은 특정한 시기(1960년대 중반), 특정한 세대(서울의 새로운 문학평론가 그룹)에 의해 자신들의 담론적 기반과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증거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리고 "나라 잃은 시기에 절필한 뒤 오래도록 작품을 쓰지 않고 있다가 문단에 화려하게 복귀했다는 아름다운 신화가 됐다"는 것.

요산은 왜 사실과 다른 절필을 강조했을까?

"문학적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거겠죠. 사실 '설날'과 '옥중회고'는 자신의 이념은 잘 살렸지만 쓰다 만 듯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거든요." (염무웅)

"워낙 허덕이며 살아온 인생이라 작품 완성도를 높이는데 제대로 노력을 못 기울였다는 인식 때문이겠지요."(백낙청)

'작품다운 작품'에 대한 작가적 고민과 '글 같은 글'에 대한 요산의 강한 문학적 자의식 때문이란 해석이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던' 그 울림에 공감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일제 말과 정부수립 이후 그가 겪은 굴욕의 경험을 괄호침으로써 생체험의 중대 부분이 빠졌지요. 솔직하게 말했으면 충격을 해소했을 텐데."

요산 전집을 준비하고 있는 편집진들은 요산 해적이(연보)에서 '문단 복귀'라는 수식어를 뺐다. 신화를 재생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상헌 기자 tto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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