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10>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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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작가 코드' 넘어 21세기적 의미 찾아야

브론즈의 차가운 질감과 요산의 따스한 미소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요산 김정한 선생 흉상. '나를 딛고 오르라'는 음성이 들린 건 환청이었을까? 김경현 기자 view@

"요산의 작품에 대해 늘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이 되지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효석의 경우 일제시대에는 동반자 작가로 이름을 날리다 이후엔 자연주의로 연구사에서 늘 빠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년)'에선 빠졌습니다. 그때의 시대 조류가 유미주의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10년 전부터 몸에 대한 담론이 뜨면서 이효석 연구가 새로운 활기를 갖게 된 것이죠. 요산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진 옛날하고 별반 다르지 않아요." (문학평론가 류종렬)

저항, 반골, 리얼리즘과 같은 몇몇 제한된 단어로만 설명되던 요산 김정한에게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려는 게 이번 기획기사의 의도였다. 탄생 100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요산의 21세기적 의미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서동 뒷이야기'에 나오는 일본 철도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처럼 요산 선생은 양심적인 일본에 대한 존중이 있었어요.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요." (문학평론가 최원식) 반일저항작가라는 단일코드를 넘어 아시아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말로 들렸다.

요산에 대한 열린 해석은 리얼리즘이란 화두에서 첨예하게 맞붙는다.

"요산의 소설 쓰기 방식은 인류학자들이 현지 조사를 하듯 직접 찾아다니는 거죠.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장소도 사람도 구체적이죠. 지역작가들이 리얼리즘을 떠나서라도 그런 자세를 갖는 건 필요하죠. 21세기에도 전지구적 규모로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거든요. 요산 선생이 관심을 가졌던 '따라지'라 했던 사람들이 없는 것 아니거든요.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도시주변부 빈민, 소외된 여성들, 국가가 소외시킨 사람들…. TV에도 이런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듯이 요즘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도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요산이 추적한 인물들이 필요하단 거죠."

문학평론가 구모룡의 말이다. 계속 들어 보자. "요산 선생이 사회적 약자, 생태 환경, 디아스포라라는 가치있는 비전을 일찍이 제시했지만, 실은 그런 비전들을 스케일 있게 그려내지는 못했어요. 문학관에 가면 장편들이 미완성 아닙니까?(평론가 황국명의 조사에 따르면 원고지 1천392매 분량의 제목을 확인할 수 없는 미완성 장편소설을 비롯해 '세월' '난장판'으로 제목이 붙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이 다수 발견됐다.) 장편에 가면 이상하리만큼 세계관이나 이념보다 풍속에 치우치는데, 아마 장편으로 그려 내기에는 요산의 사회적 실천이 작품을 앞질렀던 것 같아요. 문제점이 있는 걸 간헐적이고 파편적으로 당대의 상황과 맞물려 이야기 했지, 총체적 세계의 관점에선 못 다뤘거든요. 생태 환경의 문제가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 문제가 된 오늘날처럼 말이죠. 진정한 극복은 그가 던져 놓은 걸 넘어서 뭔가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있을 때 가능하지요. 요산을 관통하고 넘어서야지 우회로는 넘어서는 게 아니라고 봐요."(구모룡)

조금 다른 생각들도 있다. "요산 선생은 시인들보고도 '이름없는 꽃'이란 말 제발 쓰지 마라했거든요. 시에서는 그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의 뉘앙스를 위해선 '이름없는 꽃'이라고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런 리얼리즘이 아직도 유효한가, 생각해봐야죠. 선생님이 가졌던 사회관이 그 시대로는 유효하지만, 그대로 답습한다면 문제가 있죠."(최영철 시인)

문학평론가 남송우도 비슷한 생각이다. "리얼리즘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작가를 제한할 수 있어요. 작가의 성실성이 중요해요. 요산이 식물도감을 만들었던 것처럼 본격적인 작품 한 편 쓰기 전에 얼마나 공부를 하느냐가 문제지요."

문학평론가 김중하의 말은 좀 더 직접적이다.

"요산의 정신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건 사람 사는 근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문학이 그 근본에 충실하라는 거지 리얼리즘만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요산이 잘못한 게 아니라 요산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리얼리즘이란 낱말에 매몰돼 있어요. 폭로니 저항이니, 이런 소재만 가지고 소설 쓰자니까 잘 안되잖아요. 주제는 아주 뚜렷한데, 그걸 모아 놓고 보면 극단적으로 똑같아요. 권선징악이죠. 권선징악은 주제가 아니라고 봐요. 윤리지. 리얼리즘을 너무 경직되게 받아들이면 폭을 안 가지니까 소설이 재미 없어져요. 수양산 그늘이 천리를 간다 했는데, 그 그늘에 묻혀서 후배들이 더 이상 못 큰 거지요. 그래서 요산 그늘을 벗어나라고 했어요. 요산이 글 쓰던 시대의 책무는 그걸로 끝이 났어요. 다음 세대는 선배 위에 올라서야지요.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해요. 옛날식 우물파기가 필요해요. 우물을 깊게 파려면 처음엔 넓게 파야 하죠. 소설은 우물 파는 것과 같아요. 필요에 의해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온갖 공부한 것들을 끌어모아야 하지요. 그 엄청난 폭이 소설의 깊이에 반영되는 거죠."

중국의 루쉰(魯迅)은 기울어 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요산문학관에 세워진 요산 흉상도 그 말을 하는 듯했다. -끝- 이상헌 기자 tto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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