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는 성적 종속화의 도구였다
열녀의 탄생/강명관
"왜 배운 적도 없는 가부장적 차별 의식을 갖게 됐는가? 유교 때문?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만 유교의 어떤 부분이, 또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아래 인물 사진) 교수는 무려 10년에 걸쳐 85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의 저서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돌베개/3만8천원)를 쓰게 된 이유를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책은 지루할 정도로 길지만 결론은 단순하다"고 했다. 모든 것은 "조선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을 종속시키기 위한 국가의 지원도 대단
강 교수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와 통한다"
소위 열녀(烈女)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주장은 흔한 것이다. 강 교수의 초점은 그 주장의 근거를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었다. '고열녀전', '고금열녀전', '이십오사', '삼강행실도',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로 남아 있는 열녀 관련 자료를 거의 망라했다.
분명히, 고려시대에는 열녀의 개념이 없었다. 있었다면 의부(義夫)와 짝이 되는 절부(節婦)만이 있었다. 배우자에 대한 절개는 여성만큼 남성에게도 강요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조에 와서 달라졌다. 남성의 의무는 사라지고 여성의 성적 종속성은 강화됐다.
강 교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적 가부장제 확립"을 이유로 들었다. 유가(儒家)는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봤고,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정이 우선돼야 했으며, 가정의 안정에는 남성이 권력 독점이 필요했다. 열녀는 그를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여성을 종속시키기 위한 국가(권력)의 지원은 대단했다. 부녀자가 재가할 경우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고, 수절할 경우 논과 밭을 지급하며 사회적 명예를 법으로 보장했다. 국가가 거의 독점하고 있던 인쇄·출판 시스템을 동원해 열녀를 찬양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내훈 등은 좋은 예다. 소학이나 내훈은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삶을 가르쳤다. 삼강행실도는 절개의 위기가 닥쳤을 때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거나 자결하라는 등 여성이 어떤 방법으로 열녀를 실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실 사례는 찬양고무됐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저항하다 난도질 당해 죽은 '이씨단지(李氏斷肢)' 따위 고사가 무려 441건이나 똑같은 서사로 반복되고 있다. 그 외에도 '계녀가(誡女歌)' 등 규방가사로 불리는 문학작품들도 여성을 종속시키는 텍스트로 기능했다.
강 교수는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와 통한다"며 "내가 하는 말, 내가 갖는 가치관은 정말로 나의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개인을 끊임 없이 제작하고 간섭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지금 사고하는 '나'는 참된 주체인가? 다소 철학적인 문제지만, 참으로 궁금해서 한 번쯤은 고민해 볼 일이겠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