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기사] 지도이야기 2 / 콜럼버스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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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오해' 세계역사를 바꾸다

아랍 지리학자 알-이드리시가 1154년에 만든 유럽 남쪽이 그려진 지도.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 이전의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http://ko.wikipedia.org/wiki/ 에서 인용.

"콜럼버스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를 확인하러 갔던 셈이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알고 있던' 대륙이 아닌 '모르고 있던' 미지의 세계로 전환된다. 나중에 그가 발견한 곳이 인도가 신대륙으로 알려지면서 미지의 세계로 변모해갔다" 와카바야시미키오 '지도의 상상력' 중에서.


2007년 11월 13일 해외 언론들은 인터폴과 미국 FBI 등이 세계 3개 대륙을 뒤져 도둑맞았던 역사적 세계 지도 10점을 되찾았다고 보도했다. 이 지도들은 스페인 국립 도서관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세기 이집트에 살았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세계 지도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넷판은 이 지도가 "세계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지도"라고 평가했다.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 지도를 참고해 여행 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를 이용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크로스토퍼 콜럼버스. 그는 이 지도를 보고 인도를 찾아야겠다는 영감을 얻었고 1492년 대항해에 들고 나가 아메리카를'실수로'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발견된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

그리스의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85?~165?)는 히파르코스가 BC2세기경 고안했던 경도와 위도를 사용, 세계를 가로 세로로 쪼갠 뒤 360도로 나누고, 또한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나누는 지도를 그리게 된다. 이 지도는 그의 책 지리학에 실리게 되나 아쉽게도 원본은 유실되었다. 후대의 복사본에 따라서 어림해보면'지리학'에는 그 때까지 알려진 세상을 보여주는 27장의 지도(세계지도 1장, 유럽지도 10장, 아시아지도 12장, 아프리카지도 4장)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한 장의 종이에 과학적으로 세계를 그려 넣는 지도 제작의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이런 문화의 유산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세 암흑기라는 꽤 오랜 동안의 공백기를 거쳐야만 했다. 이에 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와 지리서의 가치를 재빨리 알아챈 아랍인들은 자기네 말로 번역하여 보전, 이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12세기에 제작된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그림 1)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이슬람 세계를 경유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그리스 정교회의 인문학자 막시무스 플라데누스에 의해 1300년경'재발견' 된 이후 1410년경에 야콥스 앙겔루스에 의해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1445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타고 본격 유럽에 전파된다. 앙겔루스의 번역본에는 실리지 않았던 지도는 1477년 간행된 블로냐 판에 삽입이 되면서 항해자들의 가슴에 대양항해의 꿈을 심게 된다.



콜럼버스 항해의 조력자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 콜럼버스는 1476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에 종사하게 된다. 1478년경 결혼을 하면서 지도제작자였던 장인 유품으로 각종 해도와 항해 일지 등을 장모로 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품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이었다.

한편 리스본 정착과 결혼 사이인 1477년에는 콜럼버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에 블로냐에서 간행된 프톨레마이오스의'지리학'에 세계지도가 삽입된 것이다. 그 지도에는 스리랑카와 말레이반도를 넘어서 중국까지 표현이 되고 아시아가 실제보다 동쪽으로 훨씬 더 확장되어 있어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이 지도는 1478년 로마판을 거쳐서 베네딕트 수도사인 도미니우스 니콜리우스 게르마누스가 그린 지도를 1482년 목판 판각자 요하네스 슈니처가 목판본(그림2)으로 대중에 알려진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은 인도를 항해하고자하는 유럽의 항해자들에게는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콜럼버스 역시 동방견문록 곳곳에 메모를 하면서 중국과 인도를 향한 그의 꿈을 키워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최신 이론이었던 이탈리아인 토스카넬리의 '지구구체설'도 콜럼버스가 실질적으로 대양으로 항해해 나갈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스카넬리는 콜럼버스와 교제하면서 포르투갈의 리스본 궁정에 지구구체설에 의한 세계지도와 서한을 보내, 향료 제도를 향해 서쪽으로 항해하는 계획안을 기술했는데 이 서한과 지도의 사본은 1492년 첫 번째 신세계 항해 때 콜럼버스와 동행한 지침서였다.

마침내 1492년 8월3일 콜럼버스는 두달 열흘 정도 대서양을 건넌 끝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다. 그후 1504년까지 세차례 더 항해한 그는 1506년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으면서 눈을 감았다.

자신이 도달한 땅을 평생 서인도라 믿었던 콜럼버스에게는 '이미 알고 있던 세계'가 '미지의 세계'로 바뀌는 전환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항해를 계속한 항해자들에 의해 비로소 신세계로 알려지게 되면서 '미지의 세계'로 변모 되어갔다.

지구는 유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적인 정확성에도 불구, 경험적 지식의 결핍과 오류가 낳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오해'가 세계의 역사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SEA& 강승철기자ds5bsn@busanilbo.com 도움말=부산대 지리교육과 정인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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