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년] 고향 떠난 200만 명 산비탈·공동묘지에 움막
'피란민촌' 어떻게 만들어졌나
·전쟁 속에 피어난 '꽃'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마을'은 60년 전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기구한 애환을 간직한 곳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포화를 피해 전국에서 200만 명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터는 턱 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등을 뉠 수 있는 한 뼘의 땅이라도 있다면 도로변과 산비탈, 공동묘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구덕고개 원주민들
쓰던 방 내주며 애틋한 동거
담 안에 무덤 그대로 둔 채
얼기설기 집 지어 목숨 부지
구덕령(九德嶺) 정상에 위치한 꽃마을까지 피란민 발길이 닿은 것도 이러한 연유였다. 당시 꽃마을에서 부산전차 종점이 있던 구덕운동장까지는 차편이 없어 30분 이상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해방 직후까지 꽃마을은 초가집 60여 채가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여 세대의 피란민들이 정착해 원주민 수를 넘어섰고, 마을의 규모도 커졌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구덕령, 꽃마을 사람들은 피란민들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방 2칸 중 1칸을, 3칸인 집은 2칸을 내줘가며 이들을 보듬었다. 집집마다 원주민과 피란민의 애틋한 동거생활이 펼쳐졌다.
마을 주민 김성태(78) 씨처럼 방 2칸 전부를 피란민 가족에게 내어준 경우도 있었다. 김 씨의 어머니는 피란길에 남편과 헤어진 새댁과 함께 안방을 썼고, 작은방에는 6명의 피란민 가족을 들였다.
김 씨는 "당시 꽃마을 일대는 국·시유지가 대부분인 데다 감시가 심해 다른 지역처럼 움막을 함부로 지을 수 없었다"면서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을 내칠 수 없어 주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방을 내줬다"고 회고했다.
고난의 피란생활이었지만 꽃마을 피란민들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었다. 시내 다방과 상가 등지에 꽃을 내다 팔며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란민이 유입돼 부산 인구가 늘어났고, 이는 꽃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다방과 상점 등 꽃을 찾는 가게가 늘어났고, 서울 등지에서 온 부유층도 주요 고객이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꽃을 내다 파는 사람들은 꽃마을의 젊은 아낙들이 유일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인근 엄광산과 구덕산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꺾어다 일본인들에게 판매했던 경험이 밑바탕이었다. 특히 다방, 상점, 가정집 등 꽃을 찾는 '단골' 위주의 방문판매라 큰 품을 안 팔아도 됐다.
이들은 마을에서 꽃을 재배해 팔거나, 판매할 꽃을 김해와 마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떼어오기도 했다. 새벽이면 대야 한가득 꽃을 머리에 이고 일렬로 고갯길을 내려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당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장관이었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이라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카네이션과 달리아, 가을에는 국화가 인기였다.
꽃마을은 60년대 중반 또 한 번의 전쟁을 겪으며 재차 꽃을 피웠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꽃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국군 장병들 목에는 어김없이 '꽃마을표' 꽃다발이 하나씩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인 꽃, 꽃을 상징하는 꽃마을의 번성과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꽃마을에는 1981년 구청에서 건설한 7천200㎡(약 2천여 평) 규모의 양묘장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꽃들은 지역 내 길거리나 화단 등 조경용으로만 사용된다.
몇몇은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과 평화시장에서 꽃 도매상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9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면서 꽃마을 아낙네들 중 일부는 음식점을 열어 이들을 맞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피란민촌 중에서도 소위 공동묘지 마을로 불리는 곳은 피란민들의 애환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당시 피란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자의 공간까지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은 농막마을(지금의 문현 안동네) 뒷산 공동묘지에 형성됐다. 문현초등학교 뒤편 골짜기에 있던 농막마을은 옛날 막노동꾼이나 가난한 농부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 일제강점기 말기 30채가량의 이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공동묘지 주변으로도 판잣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무덤 옆 공터에 조심스럽게 집을 지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무덤을 절개하여 반만 남겨둔 채 집을 짓는가 하면, 담 안에 무덤을 그대로 두고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8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서구 아미동 묘지마을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란을 와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이곳 공동묘지로 흘러들었다.
다른 피란민 정착지역과 달리 아미동 무덤 일대는 땅이 평평해 외려 집을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인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대로 집벽으로 활용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 시절,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 데 유용한 건축자재였다.
마을주민 이상묵(75) 씨는 "당시에는 눈앞의 생존을 위해선 무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면서 "대부분의 피란민들이 납골함 위에 놓여 있던 비석과 상석, 받침돌 등 커다란 돌덩이들을 옮길 수 없어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 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도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