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허구연 - 야구선수 15년 · 마이크 30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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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인프라 확충에 왜 목매냐고요?

지난 21일 양산 원동중 야구부 창단식에서 선수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는 허구연 위원장. 이재찬 기자 chan@

'허구연을 모르면 간첩이다.'

너무 식상한 표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에게는 이 말보다 더 어울리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는 허구연(60) 야구해설위원을 만나면 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그는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 정도로 바쁜 사람이다. 그를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독차지해서 인터뷰를 했다. 그의 야구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 60년대 엄친아!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우연히 4번 타자 '선수의 길'

그날 쉬었더라면…
1976년 한·일전 때 다리 부상
4차례 수술 현역생활 마감

■제1막 야구 선수의 길을 걷다

1장 반장, 네가 야구 해라

허 위원장은 경남 진주가 고향이다. 5남1녀 중 넷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그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정말 운명이었다. 본인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운명적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당시 부산시장기 초등야구대회라는 게 있었다. 그가 다니던 대신초등에서는 야구부 선수 외에 각 반에서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을 한 명씩 뽑아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허 위원장은 공부를 잘하고 운동도 잘해 당시 반장이었다고 한다. 담임선생이 "네가 반 대표로 나가라"고 말했다.

선수를 고르기 위해 테스트가 열렸다. 허 위원장은 생전 처음 들어선 야구타석에서 정식 야구부 투수가 던진 공을 멀리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야구대회에 팀 4번타자로 출장했고, 대신초등은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 집은 당시 구덕공설운동장 바로 뒤였어요. 학교를 오가면서 운동장에서 열렸던 야구, 축구, 배구, 농구는 물론이고 수영, 레슬링 같은 경기도 많이 봤어요. 야구를 할 때는 그때 본 것을 그냥 따라 해 본 거죠."

부산중에서 특기자로 허 위원장을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시험을 쳐서 경남중에 합격했다. 운동은 안 하고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위 형은 서울고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허 위원장에게 "너는 경기고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가 공부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시골 할머니 집에 있는데 학교에서 전보가 왔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더니 교장이랑 야구감독이 저보고 야구를 하래요. 가족회의를 했어요. 결국 야구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야구를 하기로 결정했죠."

경남고를 졸업한 그는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1학년 때부터 4번타자 자리를 도맡다시피 했다.

"고려대에 들어갈 때 '야구 국가대표를 하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해야지'라고 마음먹었어요. 훈련을 마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죠. 다른 선배나 동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군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을 칠 때였다. 법대 시험은 어지간한 용어는 모두 한자로 써야 했다. 그가 적지 못하는 한자는 거의 없었다.



2장 그날 쉬었더라면


 1976년 한국과 일본 올스타전이 열렸다. 허 위원장은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느라 진주에 다녀오는 바람에 열흘 정도 운동을 하지 못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대표팀 1번타자를 맡았다. 첫날 1차전에서 선두타자 홈런을 때렸다. 그날 경기는 1-0으로 한국이 이겼다. 2차전에서도 홈런을 때렸다. 1-4로 한국이 졌다.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봐요. 요즘도 그렇게 생각해요. 3차전을 앞두고 감독에게 '너무 힘드니 오늘은 쉬고 싶다'고 했더니 한 경기만 더 하라고 하더군요."

한국이 수비를 하는 차례. 허 위원장 쪽으로 송구가 날아왔다. 일본 선수가 슬라이딩을 했다. 다리를 걷어채였다. "뻑" 하는 소리가 났다. 다리뼈가 두 동강 난 것이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4차례 수술을 거쳐 겨우 다리를 살렸지만 야구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대학원이나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기적같이 고려대 법학대학원에 합격했다.

 

■제2막 프로야구 해설가의 길

1장 볼넷이 도대체 뭐야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경기대에서 강의를 했다. MBC에서 연락이 왔다. "곧 출범하는 프로야구 해설을 맡아달라." 허 위원장은 가끔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야구해설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눈여겨 본 MBC 측에서 해설가 자리를 제안했던 것.

MBC에서 1회 해설에 3만 6천500원을 주겠다고 했다. 처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냥 있으면 대학교수가 될 텐데 왜 야구해설가를 하려느냐는 것이었다. 야구해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시절이었다.

허 위원장은 프로선수처럼 연봉제로 하자고 역제안했다. 연봉은 당시 프로야구 최고선수 수준과 맞먹는 2천2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깜짝 놀란 MBC와 협상을 한 끝에 연봉 1천400만 원을 받기로 했다.

당시 월, 수, 금요일에 프로야구를 중계했다. 매일 밤에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에 출연했다. 라디오를 통해서는 날마다 해설을 했다. 힘들고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은 일본식 야구용어를 바꾸는 것이었다. 포볼, 데드볼 등을 볼넷, 몸에맞는공 등으로 변화시켰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던 MBC 프로듀서 등을 끈질기게 설득시켰다. "지금 못 바꾸면 절대 못 바꾼다고 이야기했죠. '유도는 일본어로, 태권도는 한국어로 용어가 돼 있다. 야구는 영어를 써야 한다. 아니면 제대로 된 우리말로 번역하든지'라는 게 제 주장이었습니다."

맨처음 방송을 통해 바뀐 용어를 사용하자 야구판에 난리가 났다. 야구인들은 물론 다른 방송사에서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허 위원장의 변화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뒀다. 그의 길이 옳았기 때문이다.

허 위원장은 1984년 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가 열리던 미국 베로비치로 갔다.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토미 라소다 감독 등으로부터 미국야구를 배웠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야구는 완전히 시골판이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투수가 경기를 치르고 나면 목욕탕에서 온탕에 들어가는 게 일반화돼 있었죠. 그런데 미국 선수들은 얼음으로 팔을 감싸는 이른바 '아이싱'을 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됐죠. 부상 야구선수 수술로 유명한 프랭크 조브 박사가 얼음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더군요."



지금까지 받은 사랑 야구로 보답해야죠


그는 귀국한 뒤 아이싱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는 물론 프로 감독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러던 중 삼성 라이온즈가 베로비치에 전지훈련을 갔다. 당시 마이너리그 팀과 시합을 했는데 150㎞ 강속구를 던지는 미국투수들 공을 제대로 쳐내지 못했다. 구단과 선수들은 '우리는 야구도 아니구나'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삼성이 돌아와 미국식 야구를 도입하면서 비로소 허 위원장이 맞았음이 입증됐다.

2장 감독은 체질에 안 맞아

해설가로 인기가 오르자 감독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MBC청룡이 제안을 해 왔다. 그는 거절했다. 당시 MBC 감독이 고교 은사 어우홍 씨였기 때문이다.

야구해설을 계속하면서 당시 인기 있었던 주간스포츠라는 잡지에 글을 썼다. 한 신문사에서 칼럼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칼럼이 제법 인기가 있었던지 그 신문사에서 매주 두 번 싣자고 제안했다. 거절하면 '좀 컸다고 건방지게'라는 말이 나올 판이었다. 업무 과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졌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변화가 있어야 하겠다는 고민을 했다. 1985년 그가 34세 때였다. 청보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옳다구나 싶어 덥석 받아들였다.

청보는 너무 약한 팀이었다. 그는 지도자로서 큰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사실 감독을 제대로 하려고 했다면 MBC를 맡았어야 했겠죠. 전력도 괜찮았던 데다 김재박, 이해창 같은 선수들이 후배여서 뜻도 잘 맞았을 겁니다."

청보 감독을 그만둔 뒤 미국에서 연수를 하고 있을 때 롯데에서 연락이 왔다. 팀이 어려우니 코치로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타격코치를 맡았다. 당시 감독은 성기영 씨였다. 성 감독은 그해 성적 부진으로 옷을 벗었다. 허 위원장이 감독 후보로 올랐다. 구단 내부에서는 그를 자리에 앉히기로 이미 잠정적으로 결정난 상태였다. 그는 끝까지 고사했다.

이듬해 어우홍 감독이 부임했다. 그도 오래 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허 위원장은 다시 감독대행 후보로 올랐다. 이번에도 고사했다.

허 위원장은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들어가 마이너리그를 돌며 미국야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루키리그는 물론 싱글, 더블, 트리플A까지 섭렵했다. 그 경험이 해설가 인생에 큰 도움을 줬다.

 
■제3막 야구발전의 전도사

1장 야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설가의 자리로 돌아온 허 위원장은 '야구'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남들이 귀찮고 힘들어서 맡기 싫어하는 일이나 자리를 거리낌없이 승락한다.

지난해에는 한국야구발전실행위원회를 맡았다. 야구발전을 기획만 하는 곳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실행하는 위원회다. 다른 사람들은 꺼리던 일이었다. 대학교수 22명을 브레인으로 영입했다.

은퇴 야구인 모임인 일구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국회의원 야구단 '이구동성' 감독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설가로… 코치로…
일본식 용어 퇴출 큰 보람
감독은 제 체질에 안 맞대요

부산 야구도시 맞습니꺼?
바다 보이는 야구장 하나 없어
부산시 야구 지원 더 필요


2장 '허 프라'가 된 이유

허 위원장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야구 팀 증대와 야구인프라(운동장) 확충 문제다. 10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해 온 내용들이다. 하도 인프라 이야기를 많이 해서 '허 프라'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사회인야구 팀은 1만 5천여 개에 이른다. 이들이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은 거의 없다시피한 게 현실이다. 그는 운동장 문제 해결을 위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제주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바쁘다. 몸이 열 개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이야기를 해 줘야 한다. '간첩 식별 기준'인 허 위원장이 가면 안 만나주는 단체장이 없다고 한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들 야구발전 방안에 공감하고 도와준단다. 그러니 힘들어도 전국 어디라도 안 갈 도리가 없다.

 

3장 아직 갈 길이 멀다

허 위원장이 부산시에 대해 한마디 한다.

"부산시는 롯데에 더 잘해줘야 합니다. 올해 임대료를 올렸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미국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을 짓는 데 1조 7천억 원이 들었어요. 시가 받는 사용료는 겨우 연간 10달러입니다. 1년에 부산에서 60여 경기를 합니다. 매일 사직야구장에서 축제를 여는 셈이죠. 부산시가 불꽃축제하는 데 얼마나 쏟아붓죠? 프로야구팀에게서 임대료를 받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해요. 부산은 야구도시라고 하는데 바다가 보이는 야구장 하나 없는 도시가 무슨 야구도시입니까?"

부산시처럼 해서는 프로구단이 흑자를 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구단이 적자를 줄여야 모그룹으로부터 제 대접을 받고 한국야구가 발전할 수 있다.

"창원이 새 구장을 지으면 부산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요. 야구장을 복합센터 형식으로 만들어서 운영권을 프로구단에 줘야 합니다. 그래야 구단이 흑자를 보고, 야구에 대해 투자도 더 하죠."

허 위원장은 오래전부터 남해안 야구벨트 이야기를 해 왔다. 날씨가 따뜻한 남해안 지역 도시에 야구장을 수십 개 만들자는 이야기다. 이곳으로 프로나 아마추어 팀들이 겨울 전지훈련을 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지역 지방자치단체들에는 경제적 효과가 크고, 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야구해설만 해도 잘살 텐데(?) 왜 그렇게 야구발전이라는 명제에 목매느냐고 물었다. 야구에서 받은 혜택을 야구로 돌려줘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돈을 벌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아무리 돈 잘 벌어봐야 이건희 삼성 회장만큼 벌겠어요.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야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잖아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야구해설가 인생 30년을 달려온 허 위원장. 어릴 때부터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힘들다고 한다. "사실 집에서는 말을 많이 안 해요. 30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힘들어요. 요즘은 산사에 가서 1주일 정도 푹 쉬는 게 제 꿈입니다."

말을 마친 듯 싶었던 허 위원장이 웃으면서 한마디 더 한다. "하긴 절에 가도 스님들이 저보고 야구 이야기 해달라고 할 테니 못 쉬겠죠. 허허."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전용배 교수가 본 허구연 
 야구 전도 전국 어디든 OK 
 수백㎞ 여정 마다 않아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도 허구연 위원장의 열정은 젊은 사람도 따라가기 힘들다.

최근 허 위원장의 행보가 의미 있는 것은 해설위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는 야구해설보다 신생구단 창단과 야구 인프라 확충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을 만나서 야구장 확충을 건의하기 위해 수백㎞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달린다. '잘나가는 해설위원이 무엇이 아쉬워 저렇게 읍소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야구가 최고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와는 나이 차이가 15년 이상 나지만 평소 세대 차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허 위원장은 허례허식을 태생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만나면 바로 본질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그 연령대 사람들은 과거를 반추하는 데 비해 허위원장은 미래를 상상한다.

물론 그에게도 마음의 상처가 없을 수 없다.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인간 허구연'은 그 많은 짐을 끝내 내려놓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는 회피하는 것보다는 과감히 투신하는 쪽을 택해 왔으니까.

동명대 교수


허구연

-1951년 경남 진주 출생

-대신초등-경남중-경남고-고려대

-1976년 한일은행 입단

-1982년 MBC 야구해설위원

-1985~86년 청보 핀토스 감독

-1987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

-1990~9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코치

-2001년 프로야구선수협회 자문위원

-2009년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장

 -2010년 일구회 부회장, 

 - 국회의원 야구단 이구동성 감독

 -2011년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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