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문장] 언어 벽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고백
언어의 감옥에서 / 서경식
"'모어(母語)'란 태생적으로 부모로부터 주어지는 언어이다. 누구든지 모어를 자신의 의사대로 선택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근원적이면서 피할 수 없는 모어의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34쪽)
"제국주의라는 외부로부터의 폭력의 결과 600만 명의 조선인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이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인 공동체는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로 변용당한 것이다. 이미 다언어·다문화가 되어 있는 집단을 단일혈통·단일언어·단일문화 집단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들 디아스포라와 본국의 동포들 모두의 공동 목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73~74쪽)
일본 정부가 신속하게 전후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 사회의 '인격분열' 때문이 아니다. '타자'에 대한 '일본으로서의 책임'을 자각해 이를 짊어지려는 사람들과, '타자'를 묵살하고 자기애로 일관하려는 사람들과의 대립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자가 극단적으로 소수이면서 빈약하고, 후자가 여전히 사회의 중추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단순한 현실 탓이다.(268쪽)
한국 정부가 천황을 초청하는 것에도, 천황이 방한하는 것에도 나는 반대한다.(…) 일본 국민이 자신들의 손으로 천황제를 폐지해야 하며, 이는 침략 전쟁으로 일관했던 일본의 근대와 결별하고 일본인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일본의 천황을 '화해와 평화의 사도'로 꾸며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구식민지 인민을 위무하려는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과거를 또다시 연장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347~348쪽)
재일조선지식인 서경식의 두 번째 평론집 '언어의 감옥에서'가 출간됐다. 그는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경계에 서 있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깊이있고 빼어난 문장으로 드러내왔다. '소년의 눈물'로 일본에서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을 때 "뛰어난 일본어 표현"이라는 수상 사유 앞에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냐는 고백. 책은 언어 내셔널리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또 수십 년간 진행되고 있는 일본 지식인 사회의 사상적 퇴락도 파헤친다. 대지진 참사로 마침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은 때에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도를 점검할 수 있는 책이다. 서경식 지음/권혁태 옮김/돌베개/472쪽/2만 원. 김건수 기자 kswoo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