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죽음이 이래서야
/이거룡 선문대 교수 요가학교리아슈람 교장
고대인도 자이나교에 '살레카나'라는 자살전통이 있었다.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하여 제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면, 차츰 음식을 줄여서 마침내 다리를 틀고 앉아서 죽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전통이다. 마지못해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죽음을 끌어안음으로써 오히려 죽음의 숨통을 욱죄어 버리는 신성한 의례였다.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살이었다. 물론 아무나 아무 때나 살레카나를 행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서 그 목적이 실현되었다는 확신이 섰을 때, 살레카나 서원을 한다. 말하자면, 살레카나는 세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만이 바랄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쩨쩨하게 누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앉아서 죽을 수 있다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죽음에서 벗어나는 죽음이라면, 괜찮은 자살이 아닌가 한다.
자살 바이러스 확산…죽음이 너무 가벼워
요즘 우리 주변에는 동반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자살바이러스가 번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다만 살고 싶지 않다는 절망 하나로 모여 함께 목숨을 끊는다. 물론 이전에도 자살은 있었다. 정치지도자나 대기업 총수, 또는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에 놀라기도 하고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의 연이은 집단자살은 뭔가 다르다. 자살, 그것도 여럿이 공모하여 치르는 집단자살이라면, 그 무게가 증폭될 법도 한데, 도대체 죽음에 무게가 없다. 죽음이 너무 가볍다.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다. 더욱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공모하여 감행한 동반자살이다. 그럼에도 그 뒤에는 결사(決死)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죽음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숨을 쉬는 것조차도 포기하고 싶은 삶이 등을 떠민 자살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집단 자살을 보노라면, 죽음이 너무 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죽음에 무게가 없다. 너무 쉽게 죽는다. 흔히 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자는 듯이 쉽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그런 쉬운 죽음이 아니다.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죽음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자살바이러스는 무기력한 자살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무서운 일이다. 차라리 사죄든 당부든 원망이 담긴 자살이라면, 목숨을 끊어 스스로의 결백을 밝히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자살이라면, 또는 타인에 대한 살해충동이 자신에게로 전환된 뚜렷한 징후가 보이는 자살이라면, 또는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는 자살이라면, 그 의도의 선악을 떠나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아름다움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죽음이 너무 가볍다. 죽음이 너무 무기력하다.
이미 가벼운 죽음의 징후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일상에 대한 환멸과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곳곳에 떠돌고 있었다. 현란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얄팍한 일상의 이면에 숨어든 무수한 죽음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거운 소유를 갈망하는 우리의 속성은 존재의 가벼움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삶의 무대에서 깃털처럼 가벼이 아래로 뛰어내리게 한 것은 다만 경제 불황이 아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희망하는 우리 사회의 공허함이다. 철학의 빈곤이다. 주체적 사유의 상실이다.
삶이 진지해야 하는 것처럼 죽음도 진지해야
누구에게나 죽음은 난해하다. 다만 죽은 자의 죽음이 있을 뿐, 산 자가 그 너머를 굽어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심지어 염라대왕도 죽음은 실로 난해하다고 말한다. "이전의 신들도 죽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것을 물어라. 그 물음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 그러나 적어도 죽음은 깊고 진지해야 하지 않은가? 삶이 진지해야 하는 것처럼, 죽음도 진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장례식이 죽은 자가 산 자를 초대해 벌이는 사랑과 화해의 축제가 되지 않겠는가? 죽은 자의 죽음은 산 자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산 자들의 두려움을 다독거려 어둡고 칙칙한 죽음의 그림자를 환한 웃음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 자들에게 의미 있는 죽음일 수 있다. 그래야 탄생의 환희는 죽음의 적념(寂念)으로 깊이를 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