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원조 국민 여동생 탁구여제 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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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만에… 46일 동안… 땀으로 물든 '한반도기'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순간, 우린 '통일 코리아'였다

현정화는 남북한이 사상 첫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박희만 기자 phman@

요즘 최고의 여자 스포츠 스타로 '피겨 퀸' 김연아를 꼽는다면 20여 년 전에는 단연 '피노키오' 현정화(43)를 떠올렸다. 부산 출신으로 여고 1년 때 탁구 국가대표로 발탁돼 10년간 세계 정상에 군림하면서 '국내 유일의 탁구 그랜드슬램 달성' 등 숱한 기록을 양산한 그는 '원조 국민 여동생'이다. 1991년 남북 단일팀 단체전 우승이란 감동의 이야기가 영화 '코리아'로 빚어졌다. 이를 계기로 당시 주역이었던 그를 만나 '탁구 혹은 영화,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 아버지도 탁구선수 출신 '피는 못 속여'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현정화는 여전히 바빴다. 전화와 문자가 잇따랐고, 인터뷰 도중 일본 팬이 찾아와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를 붙잡고 '탁구'부터 물었다. 처음 라켓을 잡은 때는 수정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79년.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려면 탁구부가 훈련하고 있는 체육관 앞을 지나가야 했어요. 몇 번 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3학년 이상만 선수로 뽑는다길래 3학년에 진학하자마자 지원했죠." 

그런데 재미있다. 현정화의 아버지 현진호 씨는 1950년대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낸 탁구선수 출신. 하지만 그는 부친의 권유로 탁구 라켓을 잡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폐 질환을 앓고 계셨는데, 제가 탁구부에 들어갔다고 하자 체육관에 와서 공을 쳐주시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탁구선수였다는 사실을 몰랐죠. 나중에 제가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이름이 알려지자 탁구계 어른들이 찾아와 '어쩜 그렇게 아빠를 닮았느냐' '피는 못 속인다'며 격려해 줄 때 알게 됐어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현정화는 숙연해졌다. 딸 셋 중 둘째인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모양이다. 그의 부친은 현정화가 중학생이 되던 1983년 1월 타계했다. 현정화가 세계를 제패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아버지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수정초 탁구부 시절 공 쳐주시던…
아버지 선수 이력 한참 뒤 알게 돼
"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고1 때 마침내 가슴에 단 태극마크
이듬해 양영자와 짝 '여자복식' 제패
91년 남북단일팀서 리분희와 호흡

남북단일팀 당시 리분희의 방을 찾아 `인증샷`을 찍었다.

■ 여고 1년 때 태극마크 달다

탁구에 입문한 이후 현정화는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탁구부가 있던 계성여중에 진학했다. 줄곧 다녔던 수정초등학교에서 6학년 2학기 때 대신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는 "제 이력을 보면 대신초등 졸업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수정초등학교에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고, 탁구부가 있는 계성여중과 같은 재단인 대신으로 전학한 것"이라고 확인해 준다. '피노키오'란 별명은 오뚝한 코와 깜찍한 얼굴을 보고 초등학교 선배가 지어준 것이라고.

계성여중 시절 그의 이름 석 자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다'는 특유의 근성과 '잠잘 때도 라켓을 머리맡에 둔다'고 할 만큼 지독한 연습 덕이었다. 단식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1등을 했다. 1985년 계성여상 1학년 때 마침내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현정화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귀띔해 준다. "국가대표 직전인 1984년 저와 홍차옥 선수가 함께 영국 웨일스오픈에 출전했어요. 이때 중국 선수들에게 소위 '하프 게임'으로 졌죠. 만리장성이 얼마나 높은지 일찌감치 실감했죠."

현정화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를 앞두고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단식에서 준우승한 양영자와 손발을 맞췄다. 협회에서 중국을 공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복식조를 만든 것. 이 전략은 주효했다. 현정화-양영자 조는 서울 아시안게임 단체전 우승과 이듬해 열린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복식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 세계 랭킹 1, 2, 3위가 모두 중국 선수였어요. 단식은 우리가 힘들다고 보고 복식에 주력했죠. 태릉선수촌에서 오전 4시간 연습 때 3시간은 복식, 한 시간은 단식을 할 정도였어요."

■ 서울올림픽에서 '금빛 스매싱'

그의 선수생활에 이정표를 찍는 사건은 바로 88년 서울 올림픽이다.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라 내심 단식 우승도 기대할 만큼 자신감도 넘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단식 16강전에서 소련 선수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음을 비우고 복식에 전념했다.

현정화-양영자 조는 거침없이 결승에 올라갔다. 상대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였다. 자오즈민은 훗날 안재형 선수와 국경을 넘는 사랑으로 잘 알려진 선수. 중국은 끊임없이 엔트리를 바꾼 끝에 대회 한 달 전에 선수 명단을 제출했는데, 바로 그 조가 결승에 올라온 것이다. 상대한 경험이 없고 분석도 안 돼 있어 고민을 거듭했다. 

현정화-양영자 조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세트스코어 2-1로 중국을 꺾었다. 당시 경기가 열린 서울대 체육관은 태극기의 물결과 응원의 함성으로 넘쳐났다. 탁구가 정식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서울올림픽에서 복식 금메달은 한국 여자탁구의 길목에서 우뚝 솟은 이정표였다.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을 이끌고 시상대 정상에 오른 남북단일팀.
■ 가슴 벅찼던 남북단일팀 우승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1년 2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에서 남쪽 장충식 단장과 북쪽 김형진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분단 이후 46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을 만들기로 합의한 것. 단기는 한반도기, 국가는 아리랑, 영문표기는 '코리아'로 정했다.

선수들은 일본에서 46일간 합숙훈련을 했다. "남북 선수들은 숙소에서 함께 지내지 못했어요. 선수단 버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땀방울을 흘리면서 서서히 하나가 됐죠."

예상대로 코리아팀의 결승 상대는 대회 9연속 우승을 노리는 중국. 리분희가 덩야핑(1차전)을, 현정화도 가오준(2차전)을 꺾었지만 3, 4차전(현정화-리분희 복식팀 포함)을 내리 지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가 마지막 5차전에서 유순복이 가오준을 꺾으며 한국이 우승했다. 민단과 조총련 응원단은 목이 터져라 '우리의 소원을 통일'을 부르며 응원했다. 3시간 40여 분의 접전 끝에 승리가 확정되자 선수와 감독, 임원, 그리고 1천여 명의 응원단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싸안고 울었다. "탁구를 하면서 처음 울었어요. '통일이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3시간 40분 혈투 끝 우승 확정되자 
선수·감독·임원 얼싸안고 울음바다 
영화 제의 때 "왜 이제 오셨느냐" 따져 
3개월간 배우와 땀흘려 '코리아' 탄생 
화려한 영광만큼 힘든 기억들…
"다시 태어난다면 라켓 안 잡을 것"

■ 제 발로 찾아온 '영화'

당시 우승의 주역, 현정화에게 '영화'가 찾아왔다. "2년 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데, 영화사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코리아'의 김지운 감독과 제작자가 남북단일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가 따졌죠. '왜 이제야 오셨느냐'고. 그때  태릉선수촌 근처 참치집에서 소주를 마셨는데 감독은 도망가고 제작자는 쓰러지고…."

리분희 역을 맡은 배두나에게 기본자세를 알려주고 있다.

현정화는 기분이 좋았다. 핸드볼, 스키점프처럼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속속 등장했지만, 탁구가 없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주인공이었고 무엇보다 극적이었던 91년 남북단일팀 이야기를 들고 영화인들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원과 배두나 두 명의 주연배우에게 3개월 동안 탁구를 가르쳤다. 그림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작용했다. 대충 하긴 싫었다. 무리한 운동에 배우들이 퍽퍽 쓰러졌다. 기분 좋으면 소주 3병도 받아넘기는 현정화는 술자리를 만들어 "그 정도 열정이면 할 수 있어"라고 배우들을 다독거렸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감독님' 하고 부르더니 나중에는 '언니'라고 하데요." 현재 흥행몰이 중인 영화 '코리아'는 그렇게 탄생했다.

자신으로 분한 하지원에게 주특기인 전진속공을 전수했다.

■ 마침내 달성한 그랜드슬램

현정화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올림픽에서 단식과 복식 동메달을 땄지만,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공항을 빠져나왔다. 국민들은 현정화가 금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스물세 살 어린 나이였지만 탁구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라켓을 놓고 고향 부산에서 쉬었다. 가슴 한구석엔 구멍이 난 듯 허전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태릉으로 돌아왔지만 그즈음 몸에 이상 신호가 켜졌다. "고기만 먹으면 체하는 거예요. 응급실에도 몇 번 실려갔었죠. 의사 선생님께서 식단을 바꿔보라고 하더군요. 92년부터 94년 은퇴할 때까지 2년 동안 '풀'만 먹고 운동했어요."

그런 몸 상태에서 출전한 1993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현정화는 단식 준결승에서 루마니아의 오틸리아 바데스쿠에게 기적적인 역전승을 뽑아냈다. 결승에서는 전진속공이 살아나 서울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 천징에게 3-0 완승을 거뒀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세계선수권대회 그랜드슬램(단식·복식·혼합복식·단체전)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가 됐다. 지난해 11월 국제탁구연맹은 현정화를 '명예의 전당'에 올려 이 '탁구 여제'를 세계에 공인했다.

■ 10년간 비밀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

세계 정상을 밟은 현정화는 1994년 3월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인기는 요즘 '피겨 퀸' 김연아 못지않았지만 미련 없이 정상에서 내려왔다. 공부하고 싶어 경성대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어머니가 운동하는 걸 싫어했어요. 나중에 먹고살려면 아이들이라도 가르치라며 체육과 대신 유아교육과를 권유했어요." 내친김에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경희대 체육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런 그에게 핑크빛 사랑이 찾아왔다. 현정화의 피앙세는 전북 익산이 고향인 탁구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김석만(42) 씨.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파트너로 처음 만나 몰래 사랑을 키워갔다. 10년간 비밀 연애한 끝에 1998년 4월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동갑내기로 알려졌지만, 남편이 한 살 연하다. 탁구로 인연을 맺은 이 영·호남 커풀 사이에선 서연(11)과 원준(9)이 생겼다. 현정화는 자식들에게 운동을 물려주지 않았다. "어릴 때 탁구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접었어요. 제가 걸어온 선수 생활이 힘들어 아이들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중단시킨 거죠."

딸만 셋인 현 씨 집안에 둘째인 그는 일찌감치 혼자가 된 부산의 친정 엄마를 모시고 산다. "2001년 첫아이를 낳을 때 엄마가 부산에서 올라와 산후조리를 해 줬는데, 그때 제가 함께 살자고 손을 잡았죠. 제가 일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아이들은 엄마가 키웠죠."

비 오는 날 우산을 쓴 그는 별명 `피노키오`처럼 여전히 예뻤다. 박희만 기자 phman@
 
■ 탁구 행정 책임진 여전한 '현역'

현정화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시도 탁구를 잊은 적이 없다. 은퇴 이후 한국마사회 탁구팀 코치와 감독, 그리고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을 맡으며 녹색 테이블 주변을 떠나지 않은 '영원한 현역'이다. 지난해 1월 대한탁구협회 최연소-최초의 여자 전무이사를 맡으며 이번엔 체육 행정가로도 변신했다. 특유의 마당발 행보가 이어졌다. 내년 6월 부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다. 대회 유치 이후 1991년 남북 단일팀을 떠올리며 북한팀을 초청하기로 했다. "지난달 통일부를 통해 초청장을 북한에 보냈어요. 장관께서도 흔쾌히 도와주신다고 약속했고요." 

현정화에게 부산은 어떤 곳일까. "외국에 갔다가 김해공항에 도착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밀면, 광어회, 돼지국밥을 정말 좋아해요. 나이가 들면 부산에 내려와 아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치며 보내고 싶어요." 오랜 시간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여전히 '부산의 딸'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태어나도 탁구를 할 것이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안 할 것 같아요." 선수 시절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다시 라켓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대신 한 번 하면 끝장을 보는 제 성격상 사업을 해 여성 CEO가 되고 싶어요."  김호일 선임기자 tokm@busan.com

약력

1969년 10월 6일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현진호-김말순 씨의 3자매 중 둘째로 출생 대신초-계성중-계성여상-경성대 유아교육과-고려대 교육대학원(석사)-경희대 체육대학원(박사과정 수료)    1979년 수정초등 3년 탁구 입문 남편 김석만(42)과 딸 서연(11), 아들 원준(9)


1985년  고1 때 국가대표 선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단체전 우승
1987년  뉴델리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복식 우승
1988년  서울 올림픽 복식 우승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탁구 선수권대회 혼합복식 우승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복식 우승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단체우승(남북단일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복식 동메달  
1993년  예테보리 세계탁구 선수권대회 단식 우승
1994년 3월  은퇴
1998년 4월  결혼
1999년  한국마사회 탁구단  코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탁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5년  코리아오픈대회 탁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탁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년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탁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8년  대한탁구협회 홍보이사 
2009년 1월~2011년 3월 여자탁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년 2월~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
2011년 11월  국제탁구연맹  명예의 전당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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