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왕상은 범주해운 회장
부산항 초석 놓은 '王회장'… 94세에도 '바쁜 생활'
올해로 아흔넷인 왕상은 한미친선회 회장이 서울 범주해운 회장실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박희만 기자 phman@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어쨌든 좋은 분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이야."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범주해운 회장실을 찾은 기자에게 왕상은 회장은 불쑥 한미친선회 얘기를 꺼냈다. 요지는 미국 카터 대통령 재직 당시부터 민간단체로 큰 역할을 한 한미친선회의 회장을 자신에 이어 맡으려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1951년 한국 해운업 효시 협성해운 창립
11~12대 국회 진출 8년간 정치 외도
1989년부터 한미친선회 회장 맡아
사회복지시설 챙기기도 빠지지 않아
"회사일이든 민간외교 일이든,
좋은 분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할 것"
그는 지난 1989년부터 한미친선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09년 12월 대한상의 회장에게 '내년이면 만 90세가 되는데 이젠 더 맡기 힘들다'며 후임자를 구해달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1년에 2억 원 들어가는 운영비야 내가 부담하면 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 좋은 사람이 와야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작 힘들어하는 표정은 아니다.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넷. 고령에도 그는 매일같이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범주해운에 출근해 업무를 챙기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 인터뷰가 진행된 2시간30분 내내 또렷한 눈빛으로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을 지낸 탓일까, 그는 부산시민들에게 정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국회의원 8년'은 잠깐의 외도로 치부될 만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본업은 해운이고, 부업은 민간외교, 사회복지사업이다.
그에게는 유난히 '선구자' '개척자' '전도사' 등의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한국해운의 선구자, 민간외교 개척자, 골프 대중화 전도사….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해운 및 무역 실무를 배운 그는 1951년 한국 해운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협성해운을 창립했다. 한국 최초로 선원송출업을 시작했고, 부관훼리로 페리 개념을 도입했으며 '국적취득 조건부 나용선(BBCHP)'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오늘의 부산항이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부산컨테이너부두운영공사를 처음 만들어 부산항 운영의 초석을 놓았다.
"1970년 초쯤이었을거야. 부산항에 하역장비가 없어 큰 배가 못들어오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더만. 그래서 세계 각국의 컨테이너부두를 소개한, 두툼한 일본책을 당시 10만 엔을 주고 사서 정부에 갖다줬다. 그때만해도 컨테이너란 게 낯설었어."
'요즘 해운경기가 최악인데,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내를 강조했다.
"해운업은 원래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무리하면 안되고 꾸준히 하면 된다."
그는 이어 "운임이 나쁠 때는 참는 수밖에 없다. 딴 기술을 쓰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해운업도 순탄치는 않았다. 두 번이나 회사를 빼앗겼다.
"1970년께 부관훼리를 만들기 위해 신조선을 발주하고 3개월 후면 배가 들어오는 시점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 갔더니 일본교포에게 배를 넘기라고 하더만. 후에 내가 국회의원할 때 권력으로 찾을 수 있었는데, 그러면 뭐하나 싶어 관뒀어."
또 한번은 1980년대 중반 협성선박을 내놓을 때다. 불황에 따라 정부는 해운 통폐합 조치를 내렸다. 문제가 된 것은 당시 통폐합 기준. "정부는 재무건전성이 아닌 선복량을 기준으로 통폐합을 했는데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 배를 몇 척 사넣으면 되기는 했는데 부실덩어리이던 배를 사넣어 덩치를 키우기보단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당시 '타협'이나 '실리'를 챙기기보다 '정도'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길게 보면 눈앞의 이익보다는 '정도 경영'이 답이라는 것이다.
쓴소리도 했다.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국영기업체에 맞는 거야. 한전, 가스공사, 포철같은데 말이지. 이런 곳에서는 국제 경쟁에 붙이든지, 아니면 운임 싼 곳을 넣든지 해야 하는데 뭔가 담합해서 일을 처리해. 일반 중소선사들은 핫바지야."
사회복지사업은 좀 뜸한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왕상은 회장은 한미친선회 회장으로 주한미군을 통한 한미 간 친선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그는 부산의 기업인들과 함께 남광사회복지원(금정구 노포동)을 만들었고 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남광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영도의 와치종합사회복지관에 승합차를 사라고 3천만 원을 기부했고, 요즘도 복지시설에 뭐 부족한 게 없는지 챙기고 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을 최근 부산시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시는 요즘 남광사회복지원이 쓰던 부지 일부에 공원을 만들면서 왕 회장의 호(초계·草溪)를 따 '초계 공원'으로 명명하려 하고 있다.
아흔넷의 고령에 본업과 부업을 모두 챙기는 것은 누가 봐도 보통일이 아니다.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맛있게 먹되 적게 먹고, 채식위주로 식사한다"고 한다. 그가 즐겨 먹는 것은 고추장을 넣은 상추쌈. 그는 "부산 집(중구 대청동)에 있는 텃밭에서 상추를 길러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식사보다 그가 더 강조한 건강비결은 바쁜 생활이었다.
"아이들이 5, 6살이 되면 막 부수는데 그건 호기심이 있어 그렇거든. 오늘 아침에도 독일에서 누가 와 같이 식사했고, 내일은 또 부산에 내려가. 모레는 골프약속이 잡혀 있다. 매일 호기심을 갖고 생활하려 해."
그가 보여준 하루 일과표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부산에는 한 달에 6~7번 정도 간다. "한 달에 열흘가량은 부산에 머물러. 외항선 선장도 만나야 하고, 부산 집 텃밭도 봐야 하고, 공도 쳐야 하고…."
부산CC 설립의 산파역으로 초대 회원이기도 한 왕 회장은 매월 부산CC와 동래베네스트CC에서 한 차례씩 지인들과 골프를 친다. 부산CC에선 국제회, 동래CC에선 금강회 회원들과 함께 한다.
근데 골프에 대해선 불만이 좀 있는 모양이다. "요즘은 거리가 안 나. 그래서 또박또박 쳐. 100타 안쪽이긴 한데 나인홀 돌고나면 고단해."
90대 중반의 나이에 100타 안쪽을 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 아닌가. 그의 구력은 50년을 훌쩍 넘는다. 아마 부산에서 최장 구력의 플레이어일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계획같은 거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도 나를 찾는 사람이 많다. 그냥 그간 해오던 일을 바쁘게, 열심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주환 기자 jhwan@busan.com
왕상은이 걸어온 길
1920년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32년 부산 제8소학교 졸업
1937년 부산공립중학 졸업
1941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동지사)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1951년 협성해운 설립
1957년 첫번째 자사선인 북해호 운항 개시
1961년 남광아동복지원 이사장
1963년 한국 최초의 국적취득조건부나용 선인 안동호 운항 개시
1964년 선원송출, 해운업개척의 공로로 대통령 표창장 수상
1964년 부산시 관광협회 회장
1967년 부산상의 부회장
1969년 부산 주영국 명예영사
1975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커맨더(Commander) 훈장 수상
1978년 부산컨테이너부두공사 회장
1981년 11대 국회의원 당선(부산 중·동·영도구, 민정당)
1981년 한-독의원 친선협회 회장
1983년 서독 대통령으로부터 십자공로대훈장 수훈
1985년 12대 국회의원 당선(전국구, 민정당)
1986년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기사작위 최고공로훈장
1989년 한-미 친선회 회장(현)
1993년 부산 영사단 단장
1999년 남광아동복지원 설립 및 운영 공로로대한적십자사로부터 인도장 금장 수상
1999년 존 틸렐리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부터 공로패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