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기념주화가 제자원리를 무시했다?
한국은행이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발행한 '한국의 문화유산-한글 기념주화'가 한글 제자원리를 무시한 디자인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27일 한글과 창덕궁, 수원 화성을 소재로 한 기념주화를 발행해 주문예약을 통해 약 3만 장을 판매했다. 한국은행은 보도자료에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를 시각화한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의 '한글 자음 및 모음 체계도'(1983)를 토대로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의 해설서는 디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훈민정음 자음 十자 도형은 원방상형설에 근거해 자음의 근원인 ㅁ을 가운데 놓고, 왼쪽에 혀소리(설음) ㄴㄷㅌㄹ을, 오른쪽에 어금닛소리(아음) ㄱㅋㅂㅍ을 만든다. 위로는 ㅁ의 모서리를 굽혀 ㅇㆁㆆㅎ을, 아래로는 ㅁ을 대각선으로 자른 ㄱ을 왼쪽으로 45도 돌려 ㅅㅿㅈㅊ을 만든다."
"한글 음소를 디자인적 재해석"
"소리가 곧 글자인 철학 무시"
디자인 근거 두고 학자들 논란
이런 내용이 '월간서예' 1월호에 소개되자 한글학자인 허경무 부산한글학회 회장이 같은 잡지 2월호에 박 교수에 대한 공개질의를 기고하고, 박 교수가 3월호에 답변을 실으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허 회장은 4월호에 재질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해설서와 박 교수의 답변을 요약하면 한글 기념주화는 제자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한글 음소를 디자인적 측면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원방상형설은 이사질의 '훈음종편'(1751)과 권정선의 '음경'(1906)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생각에 근거해 ㆍ와 ㅁ이 한글 자모음의 근원이라고 본다.
허 회장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조선 시대 학자들이 한글의 제자원리를 추정한 가설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발성기관의 모양에서 따와 한글 자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해례본의 설명이다. 허 회장은 "'소리가 곧 글자'라는 한글의 심오한 철학이 담긴 제자원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지금은 의미가 없어진 가설을 바탕으로 정부 기관이 기념주화를 만든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조폐공사 디자인실에 기념주화 디자인을 의뢰했고, 박 교수의 논문을 재구성한 것이 최종적으로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로 발행됐다.
이런 논란에 대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허 회장의 지적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며 "다른 기념주화와 마찬가지로 디자인 측면만 강조되다 보니 한글 제자원리를 세밀하게 검증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