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극단적 학살만은 막아야"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1개월 전 진도 앞바다에서 국민 모두가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 가라앉아버린 세월호. 많은 국민들은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 시대 한국인 모두가 공범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본의 탐욕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오히려 규제를 암덩어리로 몰아붙여 사고의 원인을 조장하고, 구조와 수습에 완벽한 무능을 보여준 정권에 분노하다가도, 우리의 투표로 그런 정부가 출범했음에 몸서리치고 있다. 삼풍백화점과 서해훼리호 사고가 난 20년 사이 우리 사회가 한 치도 진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절망과 죄책감도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질 것이다. 일상은 우리를 생각보다 그리 오래 자책감에 붙잡아두지 않는다.
억압 속 닮아 가는 인간 사악함 그려
독재자 지지한 국민 대다수도 책임
인류사 재앙 '홀로코스트'로 증언
70여 년 전 홀로코스트는 인류사의 재앙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얼마든지 무가치한 사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학살의 생존자로 자신의 기억과 사유를 끊임없이 기록하고 증언한 지은이는 종전 42년 후 68세의 생애를 자살로 마감한다. 사망 1년 전 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말하자면 그의 유서다.
책 전반부는 '기억의 표류'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졌다. 가해자들의 변명과 합리화는 어딜 가나 이런 식이다. "나는 몰랐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피해자라고 명확하게 옛일을 늘 상기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의 간섭·왜곡현상 속에 엄연한 역사는 점점 희미해진다. 지은이는 홀로코스트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극단적 폭력으로서의 학살과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소명으로 이 책을 남겼다. 이후 책은 수용소 안에서 한 줌 권력을 쥐고 또 다른 가해자로 복무한 포로들을 이야기하며, 억압 체계 속에서 그 체계를 닮아가는 인간의 사악함을 담담하게 밝힌다. 또 살아 돌아온 포로들이 겪는 심리적 공황, 수치심과 죄책감을 세심하게 표현한다.
히틀러는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은이는 히틀러 개인이나 몇몇 추종자들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정신적 나태함, 근시안적 타산, 어리석음,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고,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르는 동안 아무런 가책 없이 그를 지지한 독일 국민 대다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둬야 한다"고 명확히 밝히며 책을 마무리 짓는다.
책 제목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따왔다. '신곡'에는 지옥에 빠져 고통받는 이들을 일컬어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사악한 영혼들이 저렇게 처참한 상태에 있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서경식 교수의 말대로 안이한 희망에 눈멀지 않기 위해 가까이 두고 곱씹어봐야 할 텍스트다. 프리모 레비 지음/돌베개/280쪽/1만 3천 원.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