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 이 노래 이 명반] 29. 양희은의 1, 2집
입력 : 2016-01-21 19:05:03 수정 : 2016-01-25 12:53:55
우아하고 감정 절제된 노랫가락 뽐낸 '포크송의 전설'
발표한 곡들이 무더기로 금지되면서 일반 무대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양희은의 곡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저항 가요의 대표곡들이 됐다. ■파란만장 양희은
양희은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52년 8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첫 돌도 되기 전에 '끼'를 보였다. 채 말문이 트기도 전에 노래를 흥얼거렸고, 2살 때는 곧잘 유행 가요를 따라 부르곤 했다.
1집 '아침이슬'로 그의 시대 개막
인기 속 1974년 금지곡 지정 수난
저항 가요로 시위 현장에서 인기
2집 '서울로 가는 길'도 묶여
'운동권 가수'로 인식되며 더 장수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아이콘'
하지만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첫번째 인생의 시련을 맛본다. 활달한 성격과 노래하기를 좋아한 양희은은 재동초등학교 때는 YMCA어린이합창단원으로, 경기여고시절에는 노래 외에도 신문반원으로 활동했다. 영어 웅변에 능해 각종 영어웅변대회에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때 그녀는 학내에서 모두가 다 알 정도로 소문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외도와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 경제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장녀였던 그녀는 뭐든 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게다가 대학입시도 떨어지고 난 후 재수를 했다.
재수를 하던 어느날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찾던 음악 클럽인 명동의 '청개구리'로 놀러갔다가 가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교우가 '경기여고에서 제일 노래 잘하는 양희은이 와 있다'는 내용의 쪽지를 사회자 이백천에게 보냈다. 호기심이 생긴 이백천은 그녀를 무대로 올려 세웠고, 즉석에서 서유석의 기타반주로 팝송 두 곡을 불렀다.
이 때 사람들은 양희은의 범상치 않은 노래 실력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방송의 PD는 양희은을 전격 캐스팅한다. 첫 출연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청아하면서도 거침없고, 개성있는 노래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후 YMCA 주최 1회 포크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녀는 '청개구리'에서 재동초등학교 동문인 김민기를 만났고, 송창식, 김도향, 윤형주 등과 친분을 갖게 된다. 그 해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 후 대학에 들어가서는 통기타 가수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하고, 무대에 섰다. 이 때 그러니까 1971년 그녀는 우연히 김민기가 노래하는 '아침이슬'을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곡에 매료된다. 그녀는 김민기가 찢어서 버린 악보를 주워 테이프로 붙인 뒤 그걸 보고 노래를 불렀다. 머지않아 1집을 준비할 때, 김민기에게 '아침이슬'을 취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김민기는 친구를 격려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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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1집(왼쪽)과 2집. |
■양희은 1집 '아침이슬'이윽고 1971년 9월, 양희은은 '아침이슬'을 비롯한 신곡 4곡과 외국곡을 번안한 노래 6곡을 취입해 데뷔 앨범 '아침이슬'을 발표했다. 이는 양·희·은·시·대의 개막을 뜻하는 청신호였으며 가요계에 또 하나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전설은 그의 노래 '아침이슬'에 의해 시작되었고, '아침이슬'에 의해 공고해졌다. '아침이슬'과 양희은의 등장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1973년에는 건전 가요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정부는 다음 해에 태도를 돌변하여 이 앨범에 수록된 김민기 작곡의 노래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가사 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대한민국의 적화를 암시한다며, '그날'과 '엄마! 엄마!'는'시의 부적합'과'허무주의 조장'이라는 게 금지의 사유였다. 그리하여 이 세곡은 방송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사라지고 이 앨범은 음반 진열장에서 치워졌지만 금지된 노래들은 오히려 민주화의 시위현장에서, 소외된 노동현장에서, 시대를 논하는 각종 모임에서 불멸의 생명력을 키워갔으며 저항가요의 대명사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세월은 흘러 마침내 민주화의 성취로 이 노래들은 당연히 복권되었다.
■양희은 2집 '서울로 가는 길'1971년 당시 그녀는 라디오 방송과 클럽을 중심으로 분주한 활동을 펼쳤다. 이 해 연이어 컴필레이션 음반 '71년 폭송 히트모음 1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2집 '서울로 가는 길'을 내놓았다.
1집 타이틀곡 '아침이슬'로 존재를 알린 양희은은 포크콘서트 공연을 통하여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였고, 공연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청바지 차림에 맨발로 고목나무 위에 걸터앉아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진으로 장식된 양희은 2집은 재킷만으로 동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우아하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청량감이 감도는 노랫가락은 기존의 낡은 사랑 타령 가요들을 누르며 포크송의 위세를 떨치게 했다. 수록곡 '서울로 가는 길', '백구', '작은 연못', '새벽 길', '아름다운 것들'은 1집에 버금가는 파장을 일으키며 빅 히트했다. 당시 그녀가 클럽 한 곳에서 받은 개런티가 기자들 초봉의 세 배가 넘는 4만원이었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1972년 가을부터는 라디오 DJ로도 활동폭을 넓히며 전성기를 열어가던 그녀에게 1973년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서유석과의 결혼 스캔들이 터져 세간의 화제가 되더니만 '꽃피우는 아이',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엄마! 엄마!', '작은 연못', '백구', '서울로 가는 길' 등 무려 30여 곡이 무더기로 독재 정권에 의해 금지곡으로 재단되었던 것.
아이러니컬한 것은 독재정권이 간섭을 하고 제재를 가하면 가할수록 이른바 금지곡들은 더 큰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지성팬들은 포크 가수들의 금지곡들을 저항 가요의 대표곡들로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나 '작은 연못' 같은 노래들도 일반 무대에서는 듣기 힘들었으나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현장이나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서는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됐다. 양희은이 한때 '운동권 가수'로까지 인식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녀는"나는 결코 운동권이 아니었고 암울한 시절의 시대상황이 내가 부른 노래까지 어둡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우리 가요계의 위대한 유산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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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양희은. |
결론을 말하자면 양희은과 그의 음악은 우리 가요계가 가진 소중한 자산이고, 우리 가요계가 자랑할 만한 귀중한 유산이다. 더불어 그녀는 1970년대 찬란했던 청년 문화의 결실이자 아이콘이었다. 양희은은 1970년대 초중반의 활동만으로도 우리 가요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고, 우리 가요에 풍부한 영감을 불어넣어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기 소개한 1971년부터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이라는 타이틀로 유니버어살 레코드사에서 내놓은 1집, 2집 음반은 그 존재가치를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음악사적, 사회적 가치가 높은 음반이다. 그런즉 우리 대중가요의 폭을 넓히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데 그는 큰 공을 세운 한국 가요계의 진정한 디바다.
최성철·페이퍼레코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