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폐사지를 찾아서] 31. 굴불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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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 위해 몸 바친 박이차돈… 그 혼과 정신 깃들다

굴불사지 동쪽의 약사불은 약으로 중생의 병을 고치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북쪽에는 마애 미륵보살이 고요히 서 있다.

국가나 개인이나 큰 그림을

그릴 때는 방향과

목표가 중요하다.

신라는 넓게는 지리산을 남악으로,

계룡산을 서악, 태백산을 북악,

토함산을 동악으로 삼았다.

그리고 좁게 보면

남은 경주 남산, 서는 선도산,

동은 토함산이 중복되고,

북이 소금강산이다.

굴불사지가 있는

소금강산의 문화유적은

석탈해왕릉과 헌덕왕릉,

백률사와 굴불사지 사면 석불,

정상에 마모 심한

마애삼존불 정도다.

다른 세 곳에 비해 미약하나

불교의 공인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신념은 목숨도 버리게 하고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에 이미 불교를 공인하여 비약적으로 문화가 발전할 때도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추왕을 위시한 앞선 왕들도 불교에 호의적이었지만 부족 합의체인 신라에서는 왕이라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확실한 주체가 있다. 신봉자들은 부처의 신통 묘법으로 신하와 백성을 미망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했다. 온갖 잡신을 믿는 귀족들은 "승려 무리는 어린애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이상한 옷을 입고 궤변을 늘어놓는 비정상이다"라고 했다.

순교한 박이차돈 머리 떨어진
'성지' 부근서 염불소리 들려
신라 경덕왕 때 지어진 절

바위에 새겨진 사면 석불
일제강점기 일부 잘려나가고
남면 본존불도 훼손 '씁쓸'


권력의 속성은 가지면 더 가지려 한다. 법흥왕도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에 불교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때는 확실한 구원투수가 필요하다. 비록 하급 관리였지만 왕의 측근이자 20대의 열정으로 신심에 불타는 박염촉(朴厭觸) 즉 박이차돈이 묘안을 내었다. 그가 거룩한 순교자가 되는 것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일종의 친위 구데타다. 527년 8월 5일 박이차돈의 목이 잘리자 흰 피가 수십 발 솟구쳤고, 머리는 북쪽 소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 시체는 머리가 떨어진 소금강산 서쪽 마루에 묻었고, 산 아래에는 백률사(자추사)를 지어 순교를 기렸다. 
 
■땅에서 염불소리 들리고

법흥왕 때 공인(527년)된 신라 불교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온천지가 불국토가 된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완성한 경덕왕(724~759)은 신라 문화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 그 경덕왕이 박이차돈을 기리는 백률사에 행차할 때다.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파보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 사방불이 조각되고, 그곳에 굴불사(掘佛寺)를 짓는다.

올해도 벌써 두 달이 지나고 3월이다. 산업도로를 아래에 두고 조금 오르자 별천지가 시작되고 특이하게 돌출된 바위에 사면 석불을 새겨놓았다. 올 때마다 똑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주로 혼자서 사면석불에 간절히 합장하고 주위를 돌고 돈다. 그 뒤에는 누구누구가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몇 장은 항상 붙어있다. 오늘도 똑같다. 다만 사람이 바뀌었다.

■바위 속 부처님을 그려내고

비스듬히 하얀 햇살을 받은 석불들은 고요히 숨죽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바퀴 돌면서 조금 떨어져 보다가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서쪽 극락의 세계였다. 중앙의 본존 아미타불은 바위를 몸통으로 삼고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려놓았다. 좌우의 관음, 대세지보살은 따로 만들어 세워놓았다. 관음보살은 앳된 청년의 순박한 모습이다. 대세지보살은 목이 날아가고 신체가 많이 파손되어 유추해내기가 힘들다. 본존아미타불은 경직된 자세로 상체가 하체보다 너무 크게 하여 균형을 잃어버렸다. 

남쪽의 석가불 머리와 우 협사보살은 없어졌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 북쪽의 면에는 고요히 서 있는 마애미륵보살이 있다. 그 옆에는 줄 새김(선각) 관음보살이 희미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이 미륵보살도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 아름다움을 대입하기는 힘들다. 줄 새김한 11면 6비의 관음보살(얼굴 11, 팔 6)은 좌우가 이질적이지만 아름답다. 특히 팔이 6개 있는 불상은 한국에서 유일하다.

동쪽에 약사불만 한 면을 다 차지하며 혼자서 약함을 손에 들고 앉아있다. 얼굴은 둥근 타원형의 탈 모양에 목과 몸은 붙었다. 모든 신체가 투박한데 오른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너무 못났지만 오직 약으로 중생의 병을 고치겠다고 항변하는 것 같다. 8세기가 아니고 9세기나 7세기 불상으로 보인다.

마지막 남면 본존의 석가불은 목, 우 협사(夾士)의 보현보살은 통째로 떼어갔다. 남아있는 좌 협사의 문수보살은 코만 떼어갔는데도 아름다움은 남아 마음을 설레게 한다. 죽어서 극락도 좋지만 살아서 행복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래서 현세불인 석가불상을 제일 아름답게 했구나.

■언제 만들고 어떤 수난을 당했나

이 사면 석불은 전부 경덕왕의 행차 때 기록을 가져 8세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남산의 칠불암 사면불 같이 통일된 불상들이 아니고 굉장히 이질적이라 한 시대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덕왕이 염불 소리를 듣고 파게 하니 불상이 있었단다. 이미 그 전에 새겼다는 것이다. 
사면불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박이차돈과 수많은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하여 서방정토에서 극락왕생하라고 아미타불을 새기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만들었을 것이다. 다양성으로 보는 맛은 있지만 통일감은 없다. 큰비가 내려 흙더미에 묻혔고 일부 노출되자 경덕왕이 파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굴불사를 짓고 나머지 불상을 새겼을 수도 있다.

고려 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굴불사로 존재하다가 또 큰 비가 내려 묻혔을 것이다. 사면 석불의 위치가 산 아래 계곡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이 발견하여 파낼 때도 반쯤 묻혀 있었다. 그리고는 남면의 본존불 얼굴과 우 협사인 대세지보살을 통째로 떼어갔던 것이다. 1915년 일제가 찍은 도판은 불상을 떼어간 뒤에 찍은 것이다. 고운 봄 햇살 받고 있는 석불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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