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에 현동천 물이 보태져 배나드리 마을에서부터 물줄기가 제법 거세졌다. 세월교를 건너니 고재 마을엔 민가 한 채만 남아 마을을 지킨다. 취재팀이 고재 마을 푸른 언덕을 넘고 있다.
'召羅洞天(소라동천) 活人之洞(활인지동) 世求吉地(세구길지) 有知可入(유지가입).' '여기는 신선이 사는 소라국. 가히 사람을 살리는 마을. 세상에서 찾는 좋은 땅이로다. 알면 들어갈 수 있나니'로 어설프게 해석해서 읽었다. 소라동천. 그곳의 사방은 산록에 둘러싸인 벽이요, 아래는 원시의 낙동강. 오직 푸른 하늘만 뚫려 있다. 분천역을 지나 풍애마을 절벽을 넘어서자 신선이 산다는 옛 소라왕국이 펼쳐졌다. 늙은 농부는 후천개벽의 세상을 아직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황지의 물길은 이상향에 닿았다.
■낙동강에 삼태극이 있다
분천역에 도착할 때도 바람이 세차 눈을 못 뜬 기억이 있는데, 분천역에서 길을 시작하려는데 또 바람이 불었다. 얼마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나무가 부러지고, 도로 옆의 간이매점이 다 날아갔다.
사방 산록과 원시 낙동강의 조화 농부는 자연을 닮아 늙어 가고
봉화군 조성 산골물굽이길 호젓 차도 안 다니니 이젠 풀잎의 세상
시작은 순조롭지 않았지만, 낙동강 에코트레일 3구간은 분천역에서 출발하여 낙동정맥트레일 안내센터에 들렀다가 분천1교~풍애터널~풍애 덱 길~도호 마을~소라동천 각석~암들 마을~현동역~한여울소수력발전소~배나드리 임도~메밀꽃 마을 산골물굽이길~들띠 쉼터~두음교~선당교~임기교까지 20.3㎞가 무난했다. 쉬엄쉬엄 걸어 7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분천역을 빠져나와 김밥이라도 살까 하고 분식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미 소천면을 샅샅이 찾아본 뒤였고, 면 소재지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아마 분천에는 김밥을 팔 것이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온 터라 더 실망감이 컸다. 다행히 수제 쿠키를 파는 집이 있어 간식이라도 하려고 챙겼다.
분천에 낙동정맥트레일 안내센터가 있어 낙동강 에코 트레일 정보라도 들을까 하고 찾았지만 자료는 없었다. 대신 이미란 숲해설가가 황지에서부터 걸어왔다니 기념품을 챙겨 주었다. '하늘 세 평 땅 세 평'을 글로 쓴 손수건이었다.
한창 공사 중인 분천교 옆 가설다리를 지나 다시 분천1교를 건너 풍애 마을 쪽으로 들어선다. 초기 낙동강 트레일 탐사자들은 철도 풍애터널을 통과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풍애마을 뒷산 벼리길에 덱을 설치해 놓았다. 공사는 이달 말에 완전히 끝난다고 했지만, 강을 건널 수도, 터널을 통과할 수도 없어 공사 마무리 중인 덱을 따라 소라왕국의 국경을 넘어 들어갔다.
정감록에 의지해 도호마을에 정착한 백학경 옹.
백학경(89) 할아버지가 풀을 뽑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낙동강엔 삼태극이 있는데 위는 석포의 섭재, 가운데는 이곳 봉화의 도호, 아래는 안동 하회라고 했다. 6·25전쟁 때 정감록에 의지해 피란 왔는데 지금껏 무탈하게 살고 있단다.
■메밀꽃이 피는 언덕으로
백 할아버지 부엌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강굽이를 따라 걷는다. 물돌이 때문에 도호마을은 섬으로 불렸단다. 안동의 북쪽, 봉화의 동쪽에 존재했다는 전설의 고대 부족국가인 소라국과 관련한 안내판이 미니어처 같은 도호성문 옆에 세워져 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겨우 할아버지 집 뒤였다. '소라동천' 각석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여울소수력발전소 취수보 때문에 물길이 말라 작은 내로 변한 강을 건너서 바위에 새겨진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발 디딘 이곳이 바로 신선이 산다는 '동천(洞天)'이다. 주변은 온통 푸르디푸른 세상. 참 맑고 아늑하다.
보현사 입구에 용바위 쉼터가 있다. 강 건너편 특이한 바위가 용바위인 모양이다. 물길이 댐에 막혀 잘 흐르던 강이 갑자기 숨을 죽인 모습이라 안타까웠다. 물을 퍼 올려 반대쪽 강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건기에는 아예 물길이 바짝 마르기도 한다는데 저 푸른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갈 것인지.
역무원이 없는 현동역에서 가지고 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마른 낙동강이 합소삼거리에서 현동천을 만나 겨우 체면을 갖췄다. 현동교를 건너 국도 아래로 난 덱을 걷는다. 나루가 있었다는 배나드리마을엔 한여울소수력발전소가 있다. 세월교를 건너니 길가에 야생화가 반긴다. 집 한 채만 남은 고재마을을 지나 임도로 들어서자마자 도로와 만난다. 명색이 도로인데 차 한 대 만나지 못한다.
메밀 재배지 거내마을 입구에 산골물굽이길 이정표가 있다. 강을 따라가려면 도로로 계속 가야 하지만, 봉화군이 애써 만든 산골물굽이길을 택했다. 거리도 살짝 주니 기분도 좋아졌다. 언덕 위에서 본 넓은 밭 풍경은 타향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을이면 메밀꽃이 필 것인가.
거대한 바람개비가 안내하는 산골물굽이길을 따라간다. 언덕을 내려서자 여울을 만난 강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들띠마을 입구까지 기분이 좋아 오금이 저렸다.
낙동강으로 입수하는 듯한 용바위.
■마을 입구에 우체통 하나
앞서 풍애 마을에서 벼리길을 넘어왔을 때 도호마을에 있는 쉼터가 '들띠 쉼터'여서 백 할아버지께 물었지만 들띠가 뭔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 비밀이 여기서 밝혀졌다. 들띠 쉼터의 현판이 '도호 쉼터'라고 돼 있는 것이다. 쉼터 공사를 한 사람이 현판을 바꿔 단 것이라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철로와 나란히 강변으로 난 선당길을 걷는다. 알록달록 예쁜 가구 하나가 길가에 있어 과연 무엇일까 하고 가까이 가보니 들띠마을 우체통이었다. 우체부 아저씨를 배려해 마을 입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우체통을 세워 놓은 것이다. 몇 가구가 산다는 들띠마을에도 가 보고 싶었다. 그곳은 아마도 '동천'일 것이다.
이정표처럼 환하게 꽃을 피운 붉은병꽃나무의 안내를 받으며 강물이 인도해 주는 곳으로 걷는다. 두음교 삼거리 쉼터에서 소천초등교 임기분교 앞을 지난다.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다.
아름다운 배려가 있는 들띠 마을 입구 우체통.
임기리에서 내려오는 작은 내를 건너는 선당교를 지나 선당 버스 정류장에서 힘든 다리를 잠시 쉬게 한다. 다함한의원 10㎞란 이정표가 있다. 다함한의원은 젊은 부부 한의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시골로 온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한의원을 열어서 알려진 곳이다.
선당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임기교 옆으로 난 산골물굽이길 이정표를 따라간다. 옛길이 분명한 이 길은 차는 물론 경운기도 잘 다니지 않아 풀과 나무의 세상이 되었다. 호젓한 숲길이 무척 상큼하다. 낙동강 수위관측시설을 지나면 봉화군위생환경사업소 자리가 나온다. 담월 마을에 있는 또 다른 임기교에서 낙동강 에코트레일 3구간을 마무리한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취재 협조=낙동강유역환경청
▲ 낙동강 에코트레일 3구간 고도표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낙동강 에코트레일 3구간 구글어스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