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22. 이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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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 '발표는 곧 히트' 등식 입증

'팝 발라드의 레전드' 이문세는 데뷔 3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페이퍼 크리에이티브 제공

1985년부터 1989년까진 이문세의 전성시대였다. 주류 시장에서는 여전히 조용필이 가왕의 위용을 과시했지만 정작 대중을 사로잡고, 음반 업계를 평정한 건 이문세였다. 그 인기는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이문세 명작 3부작의 완결판 5집 '이문세 5'(1988)가 발매된 해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5집은 선주문만 수십만 장에 이를 정도로 폭풍 인기를 과시했으며, 무려 250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찍는다. 4집 '이문세 4'(1987)의 경우 5집 발매 이후에도 인기가 계속되면서 4집 역시 285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문세 3부작(3집, 4집, 5집)의 판매량은 무려 700만 장에 육박했다. 적어도 1980년대 후반 음반 판매량으로 본 가요계의 절대강자는 이문세가 확실했다. 국내 대중음악의 밀리언셀러 시대를 활짝 연 이문세를 '팝 발라드의 레전드'라고 부르는 이유다.

■고 이영훈과의 환상적인 조화

1959년 서울생인 이문세는 1978년 CBS 방송국의 '세븐틴'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연예계에 데뷔, 타고난 입담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이후 1983년 발라드 가수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5년 그의 3집 '이문세 3'(1985)에 포함된 '난 아직 모르잖아요', '빗속에서', '휘파람', '소녀' 등이 히트하면서였다. 그가 그 이전에 발표했던 두 장의 앨범은 거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소위 이문세표 음악과는 다르다. 그 다름의 이유는 바로 유려한 키보드와 감미로운 멜로디, 클라이맥스를 이끌어 내는 밀도 있는 편곡, 외국의 그것과도 필적할 만한 현악기가 가미된 클래식한 구성 양식 등으로 대표되는 파트너 고 이영훈이 직조한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 이영훈은 자타가 공인하는 1980~1990년대 최고의 명곡을 양산했던 최고의 작곡가였으며, 이문세를 레전드로 견인한 1등 공신이었고 당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끌어 올린 '팝 발라드' 장르의 개척자였다.

이영훈과 손잡고 팝 발라드 개척
4집은 80년대 최고 명반 중 하나로
3,4,5집 무려 700만 장 판매 '대박'

지난해 '소녀' 발표 30년째 맞아
드라마 '응팔' 열풍에 다시 인기
17년 만의 콘서트 100만 관객

1985년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사무실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너지는 3집부터 시작된다. 그야말로 '발표는 곧 히트'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거침없는 하이 킥을 이어간다. 대중가요에 팝과 클래식을 접목해 격조 높은 사랑 노래를 제시한 고 이영훈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으로 노래한 이문세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대중이 기억하는 거의 모든 이문세의 히트곡은 죄다 고 이영훈이 작곡한 노래로, 당시에 발표된 노래들은 거의 다 각종 대중매체 인기차트의 최상위를 점령했다. 150만 장이 팔린 3집이 황금콤비의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 신호탄이었다면, 무려 285만 장의 판매 기록을 수립한 4집은 그때까지의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뒤엎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문세 4집은 대중가요의 부흥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198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다. 기록적인 음반 판매량은 물론이고 대중의 절대 지지를 얻어내며, 내용과 형식(음악성과 흥행) 모두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200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힘겨운 투병을 벌이다 2008년 2월 세상을 떠난 고 이영훈이 감성적으로 최정점에 올랐음을 확인시켜 주는 4집이 대한민국 팝 발라드의 정점이라면, 5집은 대한민국 팝 발라드의 완성이라 자부할 만하다. 이후 6집 '이문세 6'(1989)에서는 소녀 취향의 발라드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조국과 민족, 사회를 생각하는 시선을 적절하게 담아낸다. '그게 나였어', '장군의 동상', '해바라기' 등의 히트곡을 남긴다.

7집 '이문세 Ⅶ'(1991)은 '옛사랑', '겨울의 미소'와 같은 곡들이 성인층을 중심으로 적잖이 히트했지만, 고급스럽고 재지(Jazzy)한 이미지를 주는 대부분의 곡이 2집 이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대중적인 실패를 맛본다.

이문세와 고 이영훈이 황금콤비로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 신호탄 격인 3집 앨범 '이문세 3'.
■'응팔'로 다시 찾아온 화양연화의 초상

본 앨범의 부담과 함께 고 이영훈의 독자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이후 이문세가 잠시 이영훈과 결별하고 내놓은 앨범이 8집 'Lee Moon Sae'(1993)이다. 당시 가장 주목 받던 김현철과 유정연, 빛과소금이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한번쯤 아니 두번쯤', '종원에게' 등이 공중파를 타며 인기를 모았다. 서태지가 몰고 온 댄스와 랩의 열풍이 절정을 치닫고 있던 1995년, 이문세는 이영훈과의 재회를 통해 매우 회고적이며 고전적인 느낌의 앨범 9집 '95 Stage With Composer Lee Younghun'(1995)을 발표한다. 발군의 편곡자인 김명곤과 신세대 음악인인 김형석을 참여시켜 조화를 꾀했지만 댄스 위주로 재편된 시장에서 대중적인 참패를 맛본다. 수록곡 '영원한 사랑'을 듣고 이승환과 정석원이 '천일동안'의 편곡을 구상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9집 실패에 대한 부담이었을까. 그의 10집 '화무 花舞'(1996)는 젊고 유능한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해 보다 다양한 색깔을 담아낸다. 특히 유희열이 만들고 이적을 객원가수로 참여시킨 '조조할인'은 실로 오랜만의 공중파 넘버원곡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는 그의 재기작임이 분명했다.

그의 11집 'Sometimes'(1998)는 이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나원주, 정재형, 조규찬, 조규만 등 젊은 프로듀서들을 기용해 '솔로예찬'과 같은 대중적인 히트곡을 내놓는다. 더불어 브랜드 콘서트인 '이문세 독창회'의 하이라이트를 모은 '이문세 독창회 Ⅰ 1981-1999'(1999)를 통해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다양한 곡을 뽐낸다. 자신감을 얻은 이문세는 이영훈과 다시 만나 12집 '휴 休'(1999)를 발표한다. 회고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애수'와, 이소라와 함께 부른 '슬픈 사랑의 노래'가 사랑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비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진 못했다. 이후 1년 6개월 만에 고 이영훈과의 마지막 협업이 되는 13집 'Chapter 13'(2001)을 발표한다. '내가 멀리 있는 건', '기억이란 사랑보다', 김건모와 함께한 '女人의 향기' 등이 사랑을 받았다. 이듬해 14집 '빨간 내복'(2002)을 통해 처음으로 작사·작곡한 노래들을 담았다.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 임종을 앞둔 환자의 심정, 청소년 문제, 일상의 탈출 등 보다 다양한 주제를 발라드, 힙합 등 다양한 음악에 담았다. '빨간 내복', '우연 雨然', '유치찬란', '내 사랑 심수봉' 등이 사랑받았다.

이듬해 '이문세 독창회 Ⅱ 1981-2002'(2003)를 발표한 뒤, 지난해 13년 만의 정규앨범인 'New Direction'(2015)을 발표한다. 나얼, 규현, 김광민 그리고 노영심, 조규찬, 강현민 등의 실력파 뮤지션부터 김미은, 송용창 등 실력파 신세대 작곡가들이 두루 참여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스태프와의 협업으로, 완벽한 사운드를 구현하며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다. 더불어 자신의 브랜드 콘서트 시작 17년 만에 누적관객 100만 명 달성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때마침 2015년은 이문세의 '소녀'가 발표된 지 30년째를 맞은 해였다. '응답하라 1988'을 통해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다채로운 음악 어법으로 재해석된 그의 노래들을 통해서, 이문세를 모르던 10대들은 물론이고 과거 그의 노래에 감동했던 30~40대 어른들의 마음까지 뒤흔들며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다시금 응답 중이다. 필자에게도 역시 이문세의 노래들은 화양연화의 초상이었다.

최성철·페이퍼 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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