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2주년 특집-부산 신발 100년, 세계를 뛴다] ④ 기술력·해외진출로 일군 오늘
주문 생산자 넘어 빅 브랜드 연구·생산 파트너로
신발 100년을 맞은 한국 신발 공장 대부분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외국에 있다.
이는 당시 인건비 상승에 따른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응축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신발 브랜드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부산 신발 기업이 단순 주문자 생산방식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을 넘어 연구·개발·생산을 책임지는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파트너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인건비 압박에 90년대 중국 진출
기술 유출·인프라 부족 등으로 고전
실패 경험 삼아 동남아로 터전 옮겨
현지화·기술력으로 생산성 높여
■생존을 위한 외국 공장 진출
1970년대 일본의 신발산업은 전체 원가에서 인건비 비율이 18% 수준까지 오르자 한국과 대만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했다. 당시 한국과 대만에는 생산 시설과 숙련된 인력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한 한국과 대만은 자체 공장을 만들어 독자 수출의 길을 열게 됐다.
1988년에 이르자 한국 신발 산업은 인건비 비율이 23%에 이르렀다. 부산의 신발 산업은 공장의 외국 이전을 강요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신발 산업과는 달랐다.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대형 브랜드가 한국 신발 기업과 생산에 대한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었고 중국, 동남아에는 고급 운동화의 생산 기반이 없었다. 결국 부산 기업이 현지에 직접 투자를 해서 브랜드들이 오더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신발 기업인들은 1992년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자 중국 칭다오를 중심으로 생산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칭다오는 저렴한 인건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 부산은 바이어들이 오면 가격과 품질, 자재, 디자인 등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칭다오에는 그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
또 청도에서 부산 기업의 기술 유출은 빠르게 진행됐다. 한국의 경쟁자였던 대만 기업은 철저하게 대만기업협회의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클러스터를 만들지 못했던 부산은 자재, 인력을 중국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관련된 기술력이 현지 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출됐다.
한 신발업계 기업인은 "신발 호황기 때 부산 신발인들은 큰 어려움 없이 앞선 선배들의 인적 네트워크 속에 성장했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며 "정책적으로나 업계 차원의 고민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신발 대기업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자 부산에는 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은 1985년 5대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던 국제상사그룹의 해체였다. 이후로 1990년 43억 달러에 달했던 수출 실적도 공장 외국 이전으로 인해 1998년 8억 달러로 급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