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 풍속도] ③ 꽃보다 저축
군사작전처럼 몰아붙인 범국민 저축장려운동
“노적가리에 쌓아둔 벼는 쥐가 먹고 새가 먹지만 벼를 팔아 우체국에 저금하면 쌀 열 가마의 높은 이자로 비료 열 포대를 살 수 있습니다” 1965년 11월 11일 자 부산일보 1면에 실린 체신저축 광고다. 체신부는 ‘쌀 3500원Ⅹ10가마니Ⅹ연이율 0.264=비료 900원Ⅹ10포대’라고 구체적인 예시까지 들먹이며 ‘쌀 10가마의 이자가 비료 10포대’가 되는 기적을 설명했다. “한 끼에 쌀 한 홉씩 절약한 돈이 5년이면 황소도 사고 송아지도 살 수 있다”라거나 “막걸리 하루 한 잔 절약하면 1년에 비료가 4포대”라며 ‘농민 맞춤형’ 광고를 실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1960년대부터 저축은 시대의 화두가 됐다. “허영은 나의 적이오. 사회의 적이며, 국가의 적”(1965년 9월 25일 자 부산시 광고)이라는 부산시장의 말처럼 사치 풍조는 배격해야 할 사회악이었고, 근검절약과 저축은 최고선이었다. 1964년 ‘저축의 날’ 제정을 시작으로 범국민 저축장려운동은 불이 붙었다. 1965년 9월엔 금리현실화란 명분으로 예금금리를 15%에서 30%로 갑절이나 올리며 저축을 독려했다. 체신청의 광고는 금리현실화 직후의 그런 배경을 깔고 있다.
1966년 3월 25일엔 2개 면에 걸쳐 11개 금융기관이 저축상품 홍보에 나섰다. 국민은행은 매월 500원씩 월부로 저축하면서 최고 30만 원까지 탈 수 있는 복금타기 월부목돈 상품을, 한일은행은 금리 연 30%를 준다며 사설 계보다 유리한 ‘은행 계’인 한일적금을 소개했다. 계주가 도망쳐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때였다.
상명하달과 실적 위주의 군사문화가 저축 드라이브에도 동원됐다. 1965년 9월 22일 자 광고면엔 부산시장이 원고지 12장 분량의 저축장려 담화문을 실었다. “‘1인 1일 1원’ 모으기 운동을 벌여 84억 4700만 원이란 저축 목표액의 62.2%라는 실적을 거두고 있다”며 저축실적까지 표로 실었다. 흥미로운 건 접객업소 종사원까지 2319만 원이란 목표치를 정한 대목인데, 말이 장려지 실상은 강제에 가까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저축 장려책이 지나친 강제성을 띠어 시정이 요망된다”는 저축실무자의 보고서가 1966년 7월 20일 자에 기사화될 정도였다.
저축장려운동엔 제동장치가 없었다. 공무원은 월급에서 일정액을 떼서 적금에 가입해야 했고, 각종 인허가나 면허 조건에도 저축 의무화가 따라붙었다. 학교에선 ‘티끌 모아 태산’을 외쳤고,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저축 실적이 부진한 학생을 닦달했다. 대통령은 ‘저축은 국력’이란 친필 휘호를 전국에 배포했다.
1963년 7%였던 저축률은 1970년 14.1%로 껑충 뛰었다. 군사작전처럼 일사불란하게 몰아붙인 결과였다. 논설위원 ttong@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