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 풍속도] ④ 사람을 찾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광고면을 점령했던 애끊는 호소
“찾는 사람=한혜순(15세·여) 한원현(9세·남) 한오현(6세·남), 3인은 강원도 강릉읍 금○여관의 외손이옵니다. 지금 어머니가 부산진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너라. 어머니 이문숙”. 1950년 7월 26일 자 부산일보 2면에 실린 광고다. 존댓말과 낮춤말이 뒤섞인 광고에서 경황없던 시대 상황이 읽힌다. 여인은 인파에 휩쓸려 황급히 부산으로 피란 오는 와중에 자식과 생이별했을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맏이가 남동생 둘을 잘 건사하고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미친 듯이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몇 푼 안 남은 돈을 털어 신문에 광고를 냈을 것이다. 광고를 내놓고도 부산진역 앞을 떠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
1950년 7월 13일 자에 강원도 영월서 온 35세 남편을 찾는 아내의 광고를 시작으로 특히 그해 8월과 9월에는 매일 20건가량 ‘찾는 사람’ 광고가 부산일보 광고면을 거의 다 메웠다. 다른 광고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인천서 온 아내를 찾는 남편, 서울서 온 두 여동생을 찾는 오빠, 순창서 온 부모와 아내, 갓난아이를 찾는 사내, 서울서 온 시댁 식구를 찾는 며느리의 울부짖음이 ‘찾는 사람’에 실렸다.
인상착의와 헤어진 경위까지 세세하게 적거나 ‘꼭꼭’이나 ‘화급’처럼 간절함을 드러낸 문구도 있지만, ‘찾는 사람’에는 출신지와 이름, 관계, 연락처만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막연히 부산에 왔을 것으로 보고 “○○로 찾아오시오”로 끝나는 게 태반이다. 연락처라야 임시로 묵고 있는 여관이 대부분이지만, 거처를 못 구해 ‘부산일보 선전부 담당자’로 정한 광고도 제법 많다. 신문사 선전부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 소식을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전북에서 사신 박연진 씨, 현재 안의에 있습니다. 안심하시오. 본인”처럼 살아남았다는 안부만 전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13년 전 명륜동 쌀가게에 맡겨놓고 저를 찾을 생각을 않으시오”라며 원망하는 딸의 사연도 발견된다.
이산가족을 찾는 광고는 1951년까지 이어지다가 시나브로 줄었지만, 가출하거나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광고는 1960년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황지우의 시 ‘심인(尋人)’처럼 “입대 영장이 나왔다”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따위의 사연이 귀가를 독촉하는 문구와 함께 실렸다. 가출한 15세 딸에게 “모든 걸 용서하니 애기를 데리고 빨리 돌아오라”는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에게 “죽거나 살거나 같이 삽시다”고 울먹인 딸의 호소에선 간단찮은 집안 사정이 엿보인다.
몇 줄 안 되는 인적사항뿐이지만, 그래서 더 먹먹해지는 광고들이다. 다들 한 번쯤은 애끊는 상실의 아픔에 베인 적이 있어서다.
논설위원 ttong@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