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영원한 낙동강 파수꾼 김상화 ㈔낙동강공동체 대표
“물 문제 답은 낙동강에 있어, 진주나 합천에 구걸하면 안 돼”
뜨거운 사랑도 세월 앞에는 스러지는 법이거늘, 한 대상을 50년 가까이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보듬어 안은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랑보다 더 숭고한 종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김상화(67) ㈔낙동강공동체 대표에게 낙동강은 신앙임에 틀림없다.
1973년 첫 도보답사를 떠난 이래 지금까지 1370여 회의 현장 답사와 780여 차례의 환경사랑방을 열며 낙동강 생명운동을 펼쳐 온 김상화. 그에겐 영원한 '낙동강 지킴이'란 훈장이 붙어 있다.
칠순이 코앞이지만, 그는 오늘도 낙동강으로 향한다. 특히 올해부터 본격적인 수질관리 일원화가 시작됐기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물의 날’(22일)을 며칠 앞두고 부산 동래구 온천동 낙동강공동체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거의 30년 만에 만난 그는 새카맣던 머리에 허연 서리를 뒤집어썼지만 열정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올해 ‘물의 날’을 맞는 감회가 좀 다르지 않나?
“그렇다. 올해는 문재인정부의 역점 사업인 물 관리 일원화 원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내가 그토록 요구했던 바라 기대가 크다.”
-물 관리 일원화를 위한 정부 조직은 개편됐나?
“국토교통부 내의 수자원국이 환경부 소속이 됐고, 한국수자원공사가 환경부 산하 기관이 됐다.”
-요새 주로 무슨 일을 하나?
“수질(환경부)과 수량(수자원공사)을 관리하는 부처가 통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계속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수자원공사 간부들을 지난해 7차례 현장으로 데려갔고 올해도 20차례 현장으로 나가 같이 공부할 계획이다. 이들은 계속 탁상공론만 해 왔거든. 강에는 물만 있는 게 아니고 생활, 문화, 경제, 민속 등 여러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녹아 있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무실 모서리에는 ‘논리가 현장을 지배하려 했던 인식적 관행에서 현장을 통해 발견된 합의 논리를 존중해야 낙동강이 살아난다’(2000년 3월 '을숙도 밀레니엄 선포’)라는 구절이 붙어 있었다.
-물 관리 일원화의 의미는?
“물에는 음과 양이 있다. 풍수에서 볼 때 양은 수량이고 음은 수질이다. 개발 시대에 그걸 강제로 별거시킨 거다. 물 관리 일원화는 별거한 부부를 합거시키는 거지. 이제 수질이 잘못된 부분에 수량이, 수량이 잘못된 부분엔 수질이 응답해주면서 같이 나아가는 거다.”
김 대표는 물 관리 일원화 정책으로 낙동강에 새로운 생명의 가치와 새로운 연동식이 생겼다며, 문명사적으로 대 전환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위가 최근 금강·영산강 5개 보 가운데 3개는 해체를, 2개는 상시 개방 결정을 내렸다. 낙동강 상황은 어떤가?
“낙동강 보 처리 문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있어 좀 늦어지고 있다. 6,7월까지는 준비 기간을 거쳐 11월까지 골격을 짜게 돼 있다.”
-낙동강 재자연화(보 철거와 개방)의 문제는 뭔가?
“이명박 정권의 일방적 밀어붙이기로 낙동강에 8개 보가 생겨나면서 생태계는 엄청나게 변했다. 예컨대 보를 설치하면서 수심이 엄청 깊어졌고 양수장의 위치와 높이가 달라졌다. 그런데 이를 원래 대로 되돌리려면 많은 문제들이 대두된다. 환경단체, 농민, 어민 등이 재자연화에 대해 쓰는 언어는 같지만 내용은 다 다르다.”
-해결책은 뭔가?
“가능성, 타당성, 지속성, 안정성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멀리 출구를 정해 놓고 좀 천천히 하자고 말하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지. 그런데 그런 중대한 문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야지 정치권(국회)에 맡기면 안 돼. 지역이기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거든
-물 관리 일원화 시대에 부산이 할 일은 뭐라고 생각하나?
“부산은 수돗물 원수의 94%를 낙동강 지표수에 의존하고 있다. 낙동강 최종 집수지역인 부산의 목소리는 위(정부)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부산시장, 국회의원 등이 위로 요구하는 것 같지만 천만에. 부산시민들이 성찰을 통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찰이란 무슨 뜻인가?
“낙동강 본류를 중심으로 대구나 경남, 울산이나 부산이 요구하는 방식이 다 달라. 대구는 구미 쪽의 물을 달라 하고, 울산은 주변 물을 찾고 있고. 부산은 뭐 하나? 기껏해야 20년간 남강댐 물과 강변 여과수 등 대체상수원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 타 지역이 물을 주지도 않겠지만, 과연 그게 대안이 될 수 있겠나. 낙동강에 나타나고 있는 물 환경의 위험 지표는 부산 사람들 아니고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어. 낙동강의 생명력은 부산 사람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깊은 관심을 통해서만 지속가능할 것이다.”
-결국 부산의 물 문제는 낙동강 본류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강변 여과수나 해수담수가 먹는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건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 부산은 무조건 낙동강에서 답을 찾아야 하고 낙동강을 포기하면 안 된다. 낙동강 원수 취수를 포기하는 건 낙동강 재생을 포기하는 자인서란 말이지. 정도를 가야지 진주나 합천에 물을 구걸하고 하면 안 돼.”
김 대표는 낙동강권의 먹는 물 확보를 위해서는 광역화된 ‘선순환 상수원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즉, 대구시가 청도 운문댐(총 저수량 1억 6000만t)에서 이용하는 일일 12만t을 합천댐과 황강에서 가져가고, 대신 운문댐의 여유 수자원을 동창천과 밀양강 유지수량에 사용한다면 낙동강 본류의 수질이 좋아질 게 자명하다는 것. 특히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해 운문댐 취수를 요구하는 울산시가 소형 댐 건설로 대체 용수 확보가 가능해지면 부산의 취수원을 밀양강과 낙동강 합류 지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낙동강 본류보다 연 평균 강수량이 500㎜나 많은 남강댐 일원의 물 80%가량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낙동강 본류로 환원시킬 수 있으면 낙동강 수질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며 낙동강 유역 지방자치단체들이 상생·상존하고 낙동강의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선순환’ 시스템이라고 주창했다.
-낙동강 답사는 어떻게 시작했나?
“1973년부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낙동강에 ‘꽂힌’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부산에 내려왔는데, 야학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산과 강을 돌아다닌 게 계기였다.”
김 대표는 이후 1978년까지 수 차례의 낙동강 답사를 통해 낙동강과 사랑에 빠졌으며 5차례의 낙동강 작 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는 직접 작사·작곡한 낙동강 노래 테이프와 CD도 만들었다.
-보수주의자인 서병수 전 시장이 진보적 환경 의제인 하구둑 개방을 선포했었는데, 어떤 교감이 있었나?
“내가 어느날 서 전 시장에게 요구했지. 큰 정치를 하라고. '큰 정치가 뭐냐'고 묻길래, 하구둑을 여는 거라고 했지. 그리고 3일 뒤 서 시장이 2025년까지 하국둑을 완전 개방을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어.”
-현장 답사를 통해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답사를 하면서 주민들과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6~7명의 의형제가 생긴 것이다. 2000년부터 '낙동강 밀레니엄'의 성찰 의식으로 섭씨 영하 20도가 넘는 태백산 천제단에서 1만 배 의식을 5년간 치루었던 일도 잊을 수가 없다.”
한때 낙동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인에서 낙동강을 지키는 투사로 변해 47년째 낙동강변을 기웃거리는 김상화. 아직도 강에 나가면 강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그의 남은 소망은 낙동강 생명의 환희를 맘껏 노래할 날을 맞는 것이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내 몸 속엔 ‘딴따라’의 피가…
김상화 ㈔낙동강공동체 대표는 원래 음악 학도였다. 서울에서 대학 준비를 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산으로 낙향한 뒤 야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몸속에는 ‘딴따라’의 피가 흐른다. 1973년 초부터 야학 학생들과 낙동강 도보 답사에 나서면서 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가사를 만들고 작곡을 했다. ‘물결 따라 출렁이는 할머님 하얀 목소리, 바람속 저 갈밭은 할아범 목소리…’(오! 낙동강 중)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강이 오염되고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강의 환희는 비탄과 슬픔으로 변한다. 결국 그는 기타를 부수고 붓을 꺾어버린 뒤 투사의 길을 택한다. 그때까지 작곡한 노래가 100곡 가까이 됐으며 5차례 작곡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앞으로 2~3년간 강의 ‘메신저’ 역할을 한 뒤 다시 강을 노래하고 싶다”는 그의 목소리에 처연함이 묻어났다.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