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⑫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내 고장 빛낼 미인 만들기 프로젝트에 부산이 ‘들썩’
“미스 부산을 세계로…” 큼지막한 제목과 함께 시상대에 오른 미스코리아 부산 당선자의 전신사진과 응원하는 이들의 친필사인이 지면을 메웠다. 부산직할시 김대만 시장, 부산세관 문용섭 세관장, 부산시교육위원회 오복근 교육감, 부산상공회의소 신중달 회장 등 내로라하는 지역 인사들이 내 고장을 빛낼 미인 만들기 프로젝트에 발 벗고 나선 거다. 다음 날 서울에서 열리는 본선 대회를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모은 1966년 6월 14일 자 부산일보 8면 광고다.
대회가 열릴 때면 도시가 들썩거렸다. 교통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은 참가자의 카퍼레이드는 도심 교통을 마비시켰다. 1959년 미스 경남 선발대회를 앞둔 가두행렬 기사엔 “대회장인 국제극장을 출발해 서면 로터리를 돌아오는 1만m ‘미의 행렬’을 보려고 몰려든 인파가 부산 인구의 과반인 50만 명이라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고 할 정도였다.
첫 대회 땐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부산일보사는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미스 부산·경남 대표 선발대회를 주최했는데, 참가자 구하기에 애를 먹었다. 마감을 사흘 앞두고 도무지 지원자가 모이지 않자 기자들에게도 할당이 떨어졌다. ‘미인발굴작업’에 동원된 기자는 후일담에서 “부산세관 산하단체인 통관협회 타이피스트를 비롯해 7명의 직장 여성을 섭외하느라 한 여성에겐 32차례나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듬해인 1959년 대회에는 109명이나 되는 지원자가 밀려들었다고 한다.
1961년 미스 경남 선발대회를 앞두고 “우리 고장의 미인을 찾아내자”는 주제로 지상 좌담회도 열었다. 첫 회부터 내리 3번에 걸쳐 심사에 참여한 소설가 이주홍은 “미인대회는 자기도 몰랐던 미를 인식시켜주고 숨었던 미를 표현, 발로시켜주는 계기가 된다”며 “여성들 자신이 자연스럽게 출전해 그것이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상식화해야 한다”고 참여를 독려했다.
기업과 단체들도 후원자로 나서며 분위기 띄우기에 앞장섰다. 1964년 미스 부산 선발대회 때는 미스 대한조선공사, 미스 영도구청, 미스 농협공판장, 미스 부산예식장, 미스 고려당양과점, 미스 동아대학교, 미스 동산유지 등 스폰서의 이름을 걸고 대회에 나선 참가자가 수두룩했다.
미스 부산·경남 당선자는 후원 기업의 얼굴이 됐다. ‘다이야몬드 소주’를 출시한 대광주조는 1967년 미스 다이야몬드가 미스 부산 진에 당선됐노라며 전면광고를 냈고, 부산노라노양재전문학원은 미스 부산 진·선·미의 선발대회 의상(드레스, 수영복)을 노라노 학원에서 전담했다고 선전했다. 호프 화장품은 1962년 미스 경남 당선자를 앞세워 “호프 화장품이 이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다”고 광고했다. 미인 대회는 점차 산업과 맞물려 돌아갔다. 동양고무는 ‘100만 원짜리 하이힐 고무신 현상’ 당첨자를 발표하는 자리에 미스 동양고무를 추첨자로 내세웠고, 부산산업전람회에 참가한 미원은 미스 부산 진이 친절하게 모실 거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지역 자존심 고취의 임무를 어깨에 짊어진 참가자들은 전투에라도 임하는 듯 결연했다. 1958년 미스 경남은 전국 본선대회를 앞두고 “경남 여성들의 명예를 위해 힘껏 싸워 아낌없는 성원에 보답하겠다”며 결의를 다졌고, 1959년 미스 경남은 본선에서 준미스코리아에 그치자 “죄송합니다. 후원한 여러 어른들께 면목이 없습니다”라며 원통해 했다.
대회는 목적이 “여성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을 꺼려하는 봉건적인 인습을 타파하는 데 있다”고 했지만, 외모지상주의와 성상품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진 않았다. 1959년 사설조차 “미스 경남 당선자가 신장 168㎝ 몸무게 60㎏ 가슴 36인치·허리 25인치·엉덩이 37인치라 하면 역대 미스 유니버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며 “우리 주변에서 여성의 데이터가 세계 수준이었다는 것이 놀랄만한 사실”이라고 논평했으니 말이다. 신체를 수치로 표현한 정형화된 미의 인식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만든 짙은 그늘이었다.
미인 대회를 보는 남성의 시선은 여전히 편견에 가득 차 있었다. 1959년 부산일보에 실린 기고문이 그랬다. “여성이 남자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신세인가. 학생 시대 낙제 한 번쯤 해도 남편만 잘 만나면 그날부터 행복과 호화가 쏟아진다. 아무 노력 없이 타고난 여체미만 가지고 단 하루 만에 경남 400만은 물론 잘하면 세계 10억 인구를 차지하는 여성의 행운이란 부럽기도 하다”. 그 시절이라 해도 당치 않는 생각이지만, 이런 폭력적인 발상이 지금이라고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