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⑬ 술 권하는 사회
지상 주류품평회부터 감기 낫는다는 ‘달걀 소주’까지
“복잡한 사회, 각박한 현실. 알맞은 한 잔의 술로 피로를 풀고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때 술은 현대인의 생활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1970년 11월 30일 자 부산일보 4면에 실린 ‘제1회 부일이주회(釜日唎酒會)·인기투표’라는 전면광고의 술 예찬론이다. ‘이주(唎酒)’가 술을 음미하며 품질을 측정한다는 일본식 표현이니 술맛 품평회를 알리는 광고다. 부산일보사와 부산지방국세청이 공동으로 마련해 3회까지 계속된 지상 주류품평회는 “건강과 직결되는 술의 질적 향상과 범람하는 불량품·위조품을 추방하고 우리 고장의 술을 보호·육성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해 10월까지 부산에서 부담한 주세가 24억 5380만 원이나 됐는데, 막대한 세액이 다른 지방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지방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지역의 술을 애용해달라는 취지도 담았다.
전·현직 세무서장 4명과 부산시위생사업소장, 부산일보 편집국장을 ‘사계의 권위자’로 위촉해 심사하는 한편 독자에게 맛·색·향을 기준으로 가장 좋아하는 술을 현상 공모했다.
관해(대양주조) 매화(매화양조장) 백광(백광양조장) 등 청주 부문 10곳, 보명(부산서부주조) 무학(무학양조) 백매(영남양조) 보향(강남주조) 세화(풍한양조) 등 소주 부문 15곳, 대선 매실주·모과주(대선양조) 고려 복숭아술·산딸기주(고려주조) 사자표위스키·동양포도주(동양음료) 등 기타주 부문 5곳에 이르기까지 30곳에서 34종의 술을 출품했다. 심사 결과 청주 부문에선 매화(매화양조장) 계명(일선주조) 보수(조양양조) 옥광(삼광주조장) 한목단(한목단양조장) 관해(대양주조) 대선(대선주조), 소주 부문에선 무학(무학양조) 대양(대양주조) 명보(부산서부주조) 보향(강남주조) 새학(대학양조), 기타주 부문에선 대선 매실주·모과주(대선양조) 타이거위스키·백광포도주(백광주조) 사자표위스키·동양포도주(동양음료) 고려 산딸기주(고려주조)가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대선과 무학을 빼면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주류업체들이다.
신문 광고면엔 권주가가 넘쳐났다. “값싸고 뒤탈없는 깨끗한 이맛, 향기로운 도취 속에 다이야의 멋이 있고, 마시고 또 마시면 다이야의 꿈을 꾼다. 다이야맥주는 항도의 명물 부산의 자랑”(1965년 다이야맥주), “즐거운 인생, 명랑한 생활은 명랑소주”(1965년 신한양조) 따위의 술 광고가 하루가 멀다하고 실렸다. “안돼! 이놈이 왜 이래, 우리도 모자라는데…”라며 코끼리마저 탐내는(?) 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당들을 묘사한 삽화가 흥미로운 백광양조장의 1962년 광고도 ‘이태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봄이면 “벚꽃과 더불어 매실주의 향연”(1967년 대선주조), 여름엔 “여름철에 청로 순곡소주가 더 좋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한두 잔 상쾌한 기분으로 주무실 수 있고, 기분 좋게 깹니다”(1962년 동양주조), 가을엔 “오동잎 떨어지면 다이야 소주가 넘버원”(1964년 대선발효), 겨울엔 “긴긴밤에…한 잔(一杯) 또 한 잔(一杯)으로 묵은 정 풀어주는 순곡소주 청로”(1962년 동양주조) 따위로 알코올 향이 사시사철 신문 광고면을 뒤덮었다.
더 간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묘책으로 술꾼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1965년 신한양조는 “술병의 혁신!! 술과 컵, 안주가 구비된 편리한 술”이라며 상공부 특허를 받았다는 ‘명랑소주 편리병술’을 내놓았다. 안주 봉지가 들어간 컵을 술병에 비닐 포장으로 감쌌는데, “간편성과 저렴한 봉사가격으로 분투하시는 강호제현의 심신을 풀어드릴 것”이라고 자부했다. 이듬해엔 부산양조가 “언제 어디서나 컵과 안주가 따로 필요 없다”며 끈을 달아 휴대성을 강화한 같은 콘셉트의 왕학소주를 출시했다.
술 예찬론의 정점은 술을 문명의 척도로 삼은 1971년 대선주조 광고다. “술을 모르는 민족은 개화의 역사가 없다. 술 빚는 방법은 물론 술을 모르는 종족이 아직도 있는데, 이들은 20세기에서도 여전히 미개인종이다. 에스키모족, 호주 원주민 일부, 마라이(말레이)반도의 세망그(세망)족, 아프리카 소인인 피구미(피그미)족. 대개 이런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인종은 아직도 술을 모르거나 술 만드는 역사를 가져보지 못한 미개족들이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고는 “미개한 사람에게 술이 개화의 신호탄이라면 개명된 문화인에게는 술은 정신을 안정시키고 정상으로 유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황당한 논리까지 전개했다. 물론 이를 입증할 근거는 내놓지 않았다.
1972년 금복주양조는 한술 더 떠 감기도 낫게 한다는 ‘달걀 소주’ 예찬론까지 폈다. “애주가들이 감기를 모르고 한겨울을 지내는 건 선약(금복소주) 덕일 게다. 정말 으슬으슬해지고 감기에 걸릴 듯하거든 금복소주에 달걀 노른자위를 타서 꿀꺽해 볼 일이다. 우리 서민들이 옛날부터 경험적으로 익혀온 이 묘법의 효험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라고 자신했다.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는 주당들 농지거리의 원조격이다. 금복주양조가 강조하는 ‘달걀 소주’의 효험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밤잠을 못 이룰 때 묘약이 바로 달걀소주”라고 운을 뗀 뒤 “달걀을 깨어 노란자위만 병에 넣어 그 위에 질 좋고 위생적인 금복소주라도 부어넣어 하루에 한 번 짤랑짤랑 흔들어 두었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잔 들어보면 어떤 약에 그 효험을 비겨볼 건가”라고 큰소리를 쳤다.
파라다이스 사과주는 1976년 “인간의 생활을 대변하는 네 번째 사과가 바로 파라다이스 사과”라면서 사과주에 문명사적 가치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이브의 사과’, 두 번째는 인간의 용기를 상징하는 ‘윌리암 텔의 사과’, 세 번째는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는 ‘뉴턴의 사과’, 그리고 네 번째가 인간의 사랑과 낭만을 상징하는 ‘파라다이스의 사과’라는 거다. 애플사의 아이폰이 나오기 전의 광고이니, 그 뒤에 광고가 나왔다면 사과주는 다섯 번째로 밀렸을지 모른다.
취기를 잔뜩 올리는 만큼 애주가들의 건강을 책임진다며 ‘병 주고 약 주는’ 광고도 끊이지 않았다. 도끼로 술병을 깨는 삽화와 함께 “술병은 도끼로 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은 끊지 못한다지요?”라는 카피를 선보인 주량억제제 리카바(1971년), “술 한 잔에 시 한 수, 김삿갓도 이태백도 간장 보호에 철저했다”는 카피를 앞세운 간질환치료제 프로헤파룸(1962년), “애주가 여러분! 간의 적, 술독을 없앱시다”라는 카피의 알코올성 간장약 헬민(1982년) 따위가 대표적이다.
매일 만취해 돌아오는 남편을 향해 “그 몹쓸 사회는 왜 술을 권하는고”라며 탄식하는 현진건 소설 속 아내의 말처럼 술은 지긋지긋한 세상을 건너는 친구이자 원수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