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⑭ 하얀 피부에의 열망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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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백 집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종차별의 서사

흑인 몸의 절반이 하얘질 정도로 효과가 좋다(?)는 걸 강조한 코티 화장비누 광고. 1958년 6월 8일 자 부산일보 2면. 흑인 몸의 절반이 하얘질 정도로 효과가 좋다(?)는 걸 강조한 코티 화장비누 광고. 1958년 6월 8일 자 부산일보 2면.

1958년 6월 8일 자 부산일보 2면에 난 코티 화장비누 광고는 지금이라면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렸을 법하다. 야자나무 아래 흑인이 덩실덩실 춤추는 장면을 삽화로 그렸는데, 문제는 흑인의 몸이 정확하게 좌우로 나뉘어 반은 검고 반은 하얗다는 거다. ‘비포 애프터 광고’처럼 비누를 사용하고 난 뒤 피부가 백인처럼 하얗게 변할 정도로 미백 효과가 뛰어나다는 걸 자랑한 거다. “코티 벌꿀비누는 살결이 희어진다”는 광고 문구도 빼놓지 않았다.

코티 화장비누는 “일제 흑사탕 비누보다 배의 효력이 있다”며 하얘진 흑인이 비누를 들고 춤추는 삽화로 조금씩 변주하면서 ‘흑인이 백인이 되는 마법’ 같은 광고를 몇 차례나 더 실었다. 그런 걸 보면 당시 인종차별 논란은 불거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종차별 논란을 부를 수 있다며 ‘화이트닝(whitening)’ 대신 ‘브라이트닝(brightening)’으로 화장품 마케팅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권고가 나온 게 최근의 일이니 그 당시에만 인권 감수성이 모자랐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지 싶다.


코티 비누를 들고 덩실덩실 춤추는 흑인의 삽화가 인상적인 1957년 12월 24일 자 부산일보 1면 동산유지 광고. 코티 비누를 들고 덩실덩실 춤추는 흑인의 삽화가 인상적인 1957년 12월 24일 자 부산일보 1면 동산유지 광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 건 아마도 낯설지 않았서 일지도 모른다. “검둥이가 변해 미인이 된다”는 카피에 새하얀 일본 여성의 얼굴과 검은 얼굴을 대비한 일제강점기 비누 광고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우리도 이전부터 갖고 있던 미의식이었고, 그 속내엔 “얼굴이 희어야 귀티가 난다”라며 노동하지 않는 가진 자의 특권과 하얀 피부를 은연중에 동일시한 관념도 작동했을 것이다. 여기다 “여자의 피부가 희면 일곱 가지 결점을 가릴 수 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별난 일본 여성의 미백에 대한 집착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확대 재생산한 것도 한몫했다.

1957년 “검은 얼굴이 눈송이처럼 희고 아름다워진다”를 카피로 내건 태평양화학의 ABC 백정제(白精劑) 광고에서 여성 모델의 얼굴을 야누스처럼 희고 검은 색으로 극명하게 대비시킨 삽화는 그래서 낯설지 않다. 근 30년이 지나서 “하얗고 싶다. 하얗고 싶다!”는 주문을 외며 배우 황신혜의 야누스 얼굴을 내세운 1986년 태평양화학의 리바이탈 바이오 후레쉬 광고는 ABC 백정제 광고의 ‘실사판’이다. 누구든지 바르기만 하면 하얀 피부를 가질 수 있다는 속삭임은 예나 지금이나 화장품 광고의 대세다.


"검은 얼굴이 눈송이처럼 희고 아름다워 진다"고 선전한 ABC백정제 광고. 여성의 얼굴을 흑백이 선명하게 나눈 삽화가 인상적이다. 1959년 2월 18일 자 부산일보 4면.
배우 황신혜를 모델로 내세워 미백을 강조한 1986년 9월 10일 자 부산일보 17면 아모레 바이오 후레쉬 광고. 배우 황신혜를 모델로 내세워 미백을 강조한 1986년 9월 10일 자 부산일보 17면 아모레 바이오 후레쉬 광고.

“하얀 피부가 아름답다”란 메시지는 “하얀 피부는 여성의 자산”으로 변주됐다. 1960년 한독약품의 아빌연고 광고가 “희고 고운 살결은 현대 여성의 재산”이란 대목을 강조한 것처럼 하얀 피부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날 수 있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고,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수단으로도 보였다.

미백에 대한 집착은 서구 백인 중심의 미적 기준과 결합하면서 더 득세했다. 1960년 “미국 서독 불란서 각국 원료의 최신 처방으로 생산한다”라는 걸 강조한 여왕미용약용크림은 상품명뿐만 아니라 모델도 백인 여왕을 내세웠다. 하얀 피부는 유색 피부보다 우월하다는 편견과 함께 백인 여성을 닮고 싶고 서양 미인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도 건드렸다. 하얀 피부는 서구화된 문명의 상징이었다.


영국 여왕의 흰 피부를 강조한 한미화학의 여왕미용약용크림 광고. 1960년 4월 20일 자 부산일보 1면. 영국 여왕의 흰 피부를 강조한 한미화학의 여왕미용약용크림 광고. 1960년 4월 20일 자 부산일보 1면.

“희어진다!”라는 감탄사와 함께 “검둥이의 손발이 백인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라는 카피를 내건 1962년 ABC 화장품의 오스카 후랙클 크림 광고는 백인 우월주의의 결정판이다. “미국의 어느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손발이 희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한 결과 고무 제품에 함유된 M.B.H가 피부를 백옥같이 희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며 미백 화장품의 주성분인 하이드로퀴논의 발견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백인이 되고 싶은 ‘열등 인종’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검둥이의 손발이 백인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며 미백 성분을 강조한 오스카 후랙클 크림 광고. 1962년 9월 27일 자 부산일보 5면.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건 본능이다. 그 본능에 따르고 말고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다만 “하얀 피부가 아름답다”란 신화는 인종차별은 물론이고 미의 기준을 획일화한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지구촌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한 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진정한 아름다움 아닐까 싶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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