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매뉴얼과 체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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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변호사

‘설명서’나 ‘안내서’로 불리는 ‘매뉴얼(manual)’은 중세 신부들이 손에 들고 미사에 사용하던 작은 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기준’이라는 의미는 총기 작동법으로 사용된 군사용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도 한다. 현대 사회 다양한 직업군에서 사용되는 매뉴얼은 작업자로 하여금 정확하고 빈틈없이 ‘규정’대로 일하게 하는 강력한 장점이 있는 반면, 융통성을 없앤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도 받곤 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매뉴얼이 주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중요시되어야 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크고 작은 사고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매뉴얼 부재가 초래한 강원 산불

인사 검증에도 체크리스트 필수

융통성 없는 규제처럼 보이지만

창의력은 꾸준한 일상의 결과물

보통의 삶을 무탈하게 살기 위해

매뉴얼·체크리스트 여전히 필요

강원도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대형 산불은 고성군의 한 전신주 개폐기에 연결된 전선에 불이 붙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밀감식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이번 산불 원인과 관련하여 한전이 개폐기 안전관리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전신주 상태에 대한 순시 업무와 관련하여 순시 주체와 주기적인 전선 교체 등에 관한 내용이 분명히 내부 매뉴얼로 작성되어 있을 것이다. 한 국회의원이 한국전력으로부터 받은 강원본부 속초지사의 ‘순시실적조회’에는 해당 전신주에 대하여 발화 1시간 20분 전에 직원들에 의하여 ‘육안’으로 순시가 이루어졌음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광학카메라진단’ 같은 보다 정확한 진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육안진단’이든 ‘카메라진단’이든 확인과 지적의 기준과 토대는 모두 그러한 순시가 사전에 작성된 ‘매뉴얼’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린 한전의 ‘전신주 순시업무 매뉴얼’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혹시라도 매뉴얼이 없다면 이번 강원도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원인(遠因)은 매뉴얼의 ‘부재’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매뉴얼이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통제 수단이라면 ‘체크리스트(checklist)’는 사전적 또는 사후적으로 매뉴얼에서 제시된 기준을 질문 형식으로 바꾸어 누구나 쉽게 기준의 적합 여부를 검사할 수 있는 일종의 질문서라 할 수 있다. 어떤 물건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부터 장기간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살펴보고, 무엇을 챙겨가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우린 체크리스트를 사전에 만들고, 각 질문 항목에 체크 표시를 하면서 최종 확인을 한다.

요즘 참으로 말 많은 고위공직후보자 인사 검증을 위해서도 체크리스트는 필수적이다. 먼저 후보자를 추천하는 기관에서는 수백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사전 질문서를 갖고 있다. 과거에 낙마한 후보자들을 통해 습득한 경험을 토대로 적합한 검증 기준을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작성된 질문지에 후보자 스스로 진지하게 답변하면서 본인 스스로의 결격 여부를 확인하게 하고 자진사퇴의 기회도 부여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후보자가 특별한 의도 없이 일정 항목에 대하여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답했다 하더라도 심사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게 아니라 별도의 절차를 통해서라도 재삼재사 그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면서 검증하여야 할 것이며, 거듭된 확인이 이루어진 체크리스트가 완성되면 이를 사전에 국회 인사청문특위 위원들에게 전달하여 다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후보자의 자격에 이상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특정 후보자에 대한 질문서뿐 아니라 답변까지 외부에 공표하고 최종적인 검토와 확인을 받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은 고위 공직후보자들이 개별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청문회에서 더 이상 인신공격이나 신상 털기가 아닌 후보자의 경력과 비전, 전문성과 해당 업무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묻고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세계 최초의 5G 상용화와 빅 데이터 시대의 도래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창의성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매뉴얼’은 규제와 통제로 보일 수 있다. 혁신으로 무장하고 정해진 틀을 뛰어넘는 새로움에 대한 갈구는 우리를 ‘체크리스트’라는 존재 자체를 경시하도록 이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외치는 창의력이란 사실은 꾸준한 일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일상이란 수많은 ‘매뉴얼’과 ‘체크리스트’의 산물이다. 우린 99%의 일상적 반복과 1%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흔한 일상을 무탈하게 잘 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재난을 예방하고, 훌륭한 적격자를 공직자로 임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다름 아닌 바로 ‘매뉴얼’과 ‘체크리스트’임이 분명하다. 아직도 우리에겐 이 두 가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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