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㉑ 경품 전쟁
“주부에겐 다이야몬드 반지를…애주가에겐 다이야몬드 소주를…”
경품은 지금도 소비자를 유혹하는 주요한 마케팅 수단이지만, 특히 1960~1970년대는 신문에 하루가 멀다고 ‘일확천금’의 미끼를 내건 광고가 실려 가히 경품 마케팅의 전성시대라 불릴 만했다. 백화점은 물론이고 극장, 시장, 약국, 소주, 농약회사까지 ‘경품부 대매출(景品附大賣出)’을 내건 경품 행사가 유행처럼 번졌다.
당대의 인기 아이템을 모은 경품의 변천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당시 TV와 라디오, 전축을 비롯한 가전제품은 기본 경품 사양이었고, 미싱도 빠지지 않았다. 연탄과 황소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별나지만 그때만 해도 일상적인 경품이었다. 아주약품은 1961년 9월 월동준비현상퀴즈를 내면서 연탄을 경품으로 내놨다. 1등 3명에게 19공탄 1000개씩, 2등 5명에게 600개씩, 3등 8명에게 300개씩 주겠다고 했다. 시내는 직접 배달하고 시외는 해당 금액을 송금하겠노라고 했다. 천양주조도 1966년 ‘오아시스 19공탄 선물 행운의 주부는 누구일까’라는 광고 카피로 1등 20명에 19공탄 1000개, 2등 800명에 100개씩을 경품으로 내놨다.
황소도 경품으로 나왔다. 1963년 동광화학은 농약공장신축기념 경품부대매출이라며 1등에겐 황소 1마리를 경품으로 내놨고, 1967년 무학양조장은 2등 상품으로 황소를, 1971년 삼학소주는 1등 상품으로 황소 5마리를 내놨다.
1962년 ‘미미는 100만 원의 행운을 싣고’라는 카피로 경품 행사를 한 미미화장품은 신혼부부 맞춤형 경품을 내놨다. 특상 1명에겐 신랑·신부의 양복, 시계, 구두에다 포마이카 옷장, 미싱, 교자상, 그리고 결혼식 비용과 신혼여행비까지 5만 원 상당의 경품을 걸었다.
다이아몬드와 금을 비롯한 귀금속도 경품에서 빠지지 않았다. 1963년 우일화학은 ‘다이아몬드 100만 원 대특상’이란 제목 아래 스모커 치약을 사는 고객을 대상으로 특상 1명에게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1등에게 0.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2등에게 0.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겠다고 했다. ‘다이야몬드 소주’ 상표의 주류업체 대광주조도 1966년 ‘다이야몬드 소주가 부산시민에게 드리는 600만 원 대현상’이란 제목 아래 다이아몬드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 주부에게는 다이야몬드 반지를…애주가에겐 다이야몬드 소주를…”이란 카피로 특등 1명에겐 1캐럿짜리, 1등 3명에겐 0.5캐럿짜리, 2등 4명에겐 0.3캐럿짜리, 3등 6명에겐 0.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상품으로 내걸었고, 4등 8만 1500명에겐 다이야몬드 소주 1병씩을 주겠노라고 했다.
외국 나들이가 흔치 않던 시절, 해외여행을 특전으로 내걸기도 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제공하는 원료로 두루라 화장품을 만든다는 도일화학은 1962년 ‘평생 잊지 못할 역사적인 구라파 여행’이라며 유럽여행권을 경품으로 내놨다. 한국화장품은 1963년 이듬해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 무료 참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추첨권을 발행했다. 당첨된 애용자 40명과 특약점 주인 2명에겐 비용 일체를 대겠노라고 했다.
집과 차도 심심찮게 경품으로 나왔다. 동산유지는 1963년 코티 벌꿀비누 6주년 기념이란 제목 아래 100만 원 경품 행사를 했는데, 특등 1명에겐 문화주택자금 40만 원을 경품으로 내걸었다.
삼륜차로 시작한 주류업체의 경품전쟁은 승용차와 트럭으로까지 번졌다. 소위 왕관마개라고 하는 병뚜껑 속에 행운권을 숨겨놨다. 무학양조장은 1967년 ‘행운의 삼륜차를 찾습니다’라는 카피로 특등 1명에게 일제 삼륜차 1대, 1등 1명에겐 오토바이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대응양조는 1967년 ‘현상 붙은 대형트럭’이란 카피로 특등 1명에게 트럭 1대를 경품으로 내놨다. 1966년 삼학주조는 특등 1명에게 승용차를 주겠노라고 했다. 진로주조가 1971년 7월 “집집마다 두꺼비의 행운을!”이라는 카피로 코로나 승용차 3대를 경품으로 내걸자, 금복주와 삼학소주도 며칠 뒤 똑같은 코로나 승용차 3대를 내걸고 경품행사를 진행했다. 소주회사는 아니지만 천광유지는 1969년 밍크비누 포장지 2장으로 행운의 코로나 승용차를 가질 수 있다고 꾀었다.
경품 행사는 업종이나 규모를 가리지 않았다. 극장은 개관 기념 혹은 신축 개관 기념을 내걸고 경쟁적으로 경품 행사에 매달렸다. 왕자극장, 동명극장, 현대극장, 영남극장, 부산극장, 삼성극장, 동보극장, 태화극장 등 지금은 사라진 시내 극장들 대부분이 경품 행사를 했다. 1969년 10월 신축개관 1주년 경품 행사를 연 삼일극장은 동구 범일동 육교 옆 환창양화점서 숙녀구두 100켤레, 삼화고무에서 숙녀화 50켤레, 좌천파출소 옆 동진가구사서 화장대 1대, 범일동 카메라점 태양당서 19인치 TV 등을 협찬받아 행사를 진행했다. 부산진중앙시장과 평화시장을 비롯한 시장들도 경품 행사로 손님 끌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부산일보 광고국도 1년 치 구독권 등을 내걸고 경품 행사를 진행했다. 매년 띠풀이 경품 행사는 물론이고 부일영화상 애호가 투표, 애독자 위안 등 다양한 명분으로 4~5개 면에 걸쳐 대대적인 경품 광고를 냈다. 1966년 2월 26일 자 신춘 20만 원 대현상에서는 부일 광고부가 추천한 59곳의 업체를 소개하면서 관제엽서에 현재 애용상품, 구입예정상품, 권하고 싶은 상품을 기입해 보내면 TV 라디오 등을 주겠노라고 했다.
1963년 중구 광복동 옥광가방은 창업 18주년을 기념한다며 경품 행사를 벌였고, 창선동 동화약국은 개업 20주년을 맞았다며 TV, 미싱, 온보환 1개월분 등을 경품으로 내걸었다. 1963년 양장백화점 오성사도 TV 전축 미싱을 내걸고 경품 행사를 했다. 1965년 대청장 예식장은 약혼자 12명에게 10만 원의 축하 선물을 주겠노라고 했다. 1968년 수도피아노사는 쉼멜 피아노를 걸고 100만 원 경품 행사를 했다. 부산체신청도 1968년 ‘연하우편물 수 알아맞히기’라는 제목 아래 20만 원 현상 행사를 했다. 대구지방전매청은 담배매상고를 올리기 위해 ‘백양’ ‘사슴’ 담배에 경품권을 붙여 당첨자에게 상품을 주는 방안까지 세우기도 했다.
경품 행사가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을 사게 만들어 사행심만 조장한다는 여론도 비등했다. 1968년 개장 기념 1000만 원 경품 행사를 연 부산의 어느 시장에선 광고와 달리 실제론 200만 원어치밖에 경품을 주지 않았다며 경찰에서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경품부 판매의 규제’를 제목으로 단 1973년 6월 25일 자 부산일보 사설에서도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사행심을 조장하고 일확천금의 사고를 조성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전했다. 과당 경쟁을 부른 경품 액수만큼이나 제조 원가도 높아지고 광고 선전비도 늘어나니 결국 그만큼 원가에 반영돼 결론적으로 소비자 피해로 돌아온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실렸다.
1982년 정부는 경품 고시를 제정해 경품 지급 상한선을 두고 규제했다가 이후 규제와 해제를 거듭한 뒤 35년 만인 2016년 8월부터 소비자 현상 경품의 가격 제한 규제를 완전히 없앴다. 경품의 달콤한 미끼는 여전히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물론 소수에게 돌아갈 뜻밖의 행운을 위해 소비자가 모두 웃돈을 내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은 감춘 채 말이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