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⑰ 박멸의 사회학
온 국민이 총동원된 파리·쥐 떼와의 전쟁
악착같이 죽여야 할 것들이 도처에 널렸던 시절이었다. ‘기생충 왕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우선 몸에 침투한 적군부터 박멸해야 했다.
“누구를 위하여 밥을 먹는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패러디한 광고 카피가 1965년 6월 5일 자 부산일보 1면에 실렸다. “전 국민의 95%가 기생충 환자”라서 아무리 먹어봐야 기생충 좋은 일만 시킨다(?)며 경각심을 자극한 구충제 ‘민테졸’ 광고였다. 가뜩이나 부족한 양곡을 훔쳐먹는 쥐와 무시무시한 병균을 옮기는 파리도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1965년 들끓는 쥐의 등쌀에 이기지 못해 3년마다 제물을 마련해 무당을 불러 쥐굿을 벌인다는 경남 통영 갈도의 사연이 부산일보에 보도되자 쥐약 제조업체에서 무상으로 쥐약 60㎏을 보냈다는 미담 기사가 뒤따르던 시절이다.
쥐약 광고는 확실한 죽임을 장담했다. 1962년 10월 11일 자 부산일보 3면에 나온 ‘쥐파린’ 광고는 쥐파린을 먹고 죽은 동료를 애도하며 쥐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쥐를 풍자한 삽화로 효능을 강조했다. “쥐가 보기만 하면 먹는다” “약을 먹은 쥐는 내출혈을 일으켜 미라처럼 말라 죽는다” “죽는 놈은 꼭 밝은 곳을 찾아 나와 죽는다” “먹어서 고통이 없으므로 다른 쥐에게 동요를 주지 않아 계속 먹어 죽는다” 따위를 특징으로 내세웠지만, 근거는 내놓지 않았다.
1967년 발매된 후라킬은 “매년 100만 석의 곡식과 농작물에 막대한 해를 입으면서도 본품과 같은 우수한 쥐약이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던 쥐의 박멸을 단연코 해결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후라킬은 상표로 아예 쥐의 천적인 ‘고양이표’를 내세웠다. “후라킬을 먹으면 쥐가 빨리 죽는다” “벽장이나 다락에서 죽지 않고 마당에서 죽는다” 따위의 쉽사리 믿기지 않는 문구를 장점으로 열거했다.
파리를 잡는 살충제 광고도 그에 못지 않았다. 1951년 나온 국보화학의 ‘원자탄’을 시작으로 ‘바로살(殺)’ ‘녹크다운’ ‘노후라이’ 등 살충제는 제품명부터 살벌했다. 광고 내용도 박멸 효과에 초점이 맞춰졌다. 1961년 ‘녹크다운’ 광고는 “나르던 파리도 즉시 낙하사”한다고 했고, 1962년 ‘빈모킬라’ 광고는 “나르는 해충이 즉시 떨어져 죽고 한 번 사용한 방에는 여러 날 동안 해충이 들어오면 저절로 죽는다”고 했다. 1968년 ‘슈퍼킬러 에어솔’ 광고는 “서울파리 시골파리” 할 것 없이 집안 해충을 모조리 죽인다고 자랑했고, ‘에프킬라’ 광고는 “파리 모기가 재미있을 정도로 떨어진다”고 했다. 놀이 삼아 재미로 죽여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뿌리는 살충제만큼이나 다양한 기능의 파리약이 시장에 쏟아졌다. 1965년 4월 15일 자 부산일보 7면에 광고를 실은 ‘파리탄(彈)’은 “파리가 좋아하는 특수유인제를 배합해 모여든 파리가 파리탄을 빨아먹고 즉사한다”며 “파리가 한자리에 모여 죽어 음식물에 죽은 파리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위생적인 측면도 부각했다. 1961년 ‘몬키’ 살충제는 손으로 누르는 지압식을 강조했고, 1966년 ‘ABC파리약’은 살충과 향기를 겸한 특수제품이라고 광고했다. 1969년 ‘노페스트’는 뿌릴 필요 없이 매달아 두면 60일 동안 파리 걱정이 없는 편리함을 내세웠다.
쥐잡기와 파리잡기는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됐다. 국가가 나서서 꼼꼼하게 소탕할 목표치까지 정해 할당하고, 전국적으로 한날한시에 군사작전처럼 쥐약을 놓아 쥐를 섬멸하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상품을 내걸고 파리잡기 경진대회도 열었다.
쥐잡기 운동은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는 구호 아래 국가가 앞장서 독려했다. 1954년 경남도가 경찰서 단위로 쥐잡기 작업을 펼쳐 42만 8844마리를 소탕했고, 1963년 1인당 3마리 쥐잡기 운동을 펼쳐 경남도에서 917만 8926마리를 퇴치했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전국민운동으로 확대된 건 1970년 1월 26일 ‘전국 쥐잡기 운동’을 벌이면서부터다. 쥐섬멸작전은 이날 오후 6시 사이렌을 신호로 전국에서 일제히 시행됐다. 540만 가구가 시간에 맞춰 일제히 쥐약을 놔서 전국적으로 4154만 1149마리의 쥐를 잡았다고 한다. 1971년 3월 25일을 디데이로 정한 3차 쥐잡기 운동에선 부산시에서만 321만 7779마리의 쥐를 소탕했다고 한다. 디데이를 앞두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소탕전에 나섰는데, 1974년 3월 25일 자 부산일보 2면에 경남도지사 명의로 낸 “3월 30일 오후 6시에 쥐약 놓아 일시에 쥐를 잡자”라는 광고도 그중 하나다. 쌀과 옥수수 등을 섞어 독먹이를 만드는 법부터 애먼 가축 피해를 막기 위한 주의사항에 이르기까지 쥐잡기 운동 행동요령을 꼼꼼하게 안내했다. 얼마나 치밀했던지, 일선 구청에 마지막 한 자릿수까지 딱 떨어지는 구체적인 목표치를 할당하고 성과를 채근했다. 1972년 3월 25일 오후 7시를 쥐잡기 디데이로 정한 부산시는 중구 25만 6626마리, 서구 71만 3525마리, 부산진구 103만 4364마리, 동래구 69만 9255마리 식으로 목표량을 할당했다.
시속 80㎞ 속도로 날아다니는 파리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일상이었다. 1961년 신문에선 파리채를 든 초등학생들을 ‘애국의 파이오니어(개척자)’라고 추켜세웠고, 부산시는 집집마다 하루 세 차례 30분씩 시간을 내 파리 47억 마리를 잡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듬해 부산시는 상품을 내걸고 학교 대항 파리잡기 경진대회를 열었다. 파리를 가장 많이 잡은 학생 3명에겐 부산시장 표창장과 세발 자전거를 상품으로 내걸었고, 담임 교사에게도 표창장과 상패를 주기로 했다. 경진대회 결과 학교 대항전에선 200만 마리의 파리를 잡은 수성초등학교가 1등을 차지했고, 학급 대항전에선 감전초등학교 4학년 5반이 1등을 했다. 개인 대항전에선 광무초등학교 4학년 1반 박 모 군이 1등을 차지해 그해 8월 17일 용두산공원에서 시장 표창장과 함께 부상으로 자전거를 받았다. 1964년에는 동삼초등학교 2학년 1반 장 모 군이 32만 4000마리를 잡아 1등을 차지했다. 1965년 부산시는 ‘전염병 매개에 가장 주동적인 요물’인 파리 퇴치를 위해 7월 15일부터 한 달간 71개 초등학교 학생 23만 명으로 하여금 파리잡기 경진회를 벌이게 해 무려 163억 3000만 마리의 파리 떼를 박멸할 계획을 세웠다. 파리와의 전쟁은 그 뒤에도 이어져 1972년 한 해 부산에서만 39억여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여름방학 과제로 파리를 가득 채운 성냥갑을 제출하던 시절이었다. 위생과 경제 개발로 포장했지만, 혐오의 논리에 기댄 국가 동원 체제가 낳은 박멸의 사회 풍경이었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의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박멸의 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인간에게 정말로 위험한 것은 파리를 비롯해 해충으로 규정된 곤충이 아니라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해가며 유독성 화학약품을 몇 년째 퍼붓고 있는 우리의 곤충 박멸 전쟁이다. 하나인 세상을 굳이 좋은 종과 나쁜 종으로 나누고 나쁜 종을 악착같이 제거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을 파괴하고 있다. 한 생물에 대한 선전포고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선전포고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