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⑲ 연탄
창고 가득 쌓아두는 게 소원이었던 ‘위험한 생필품’
1950년대 중반 이후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연탄은 ‘위험한 생필품’이었다. 위아래 구멍을 일직선으로 맞춰 갈아야 하고, 때를 못 맞춰 꺼뜨리는 날엔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연탄가스 중독에 비교할 바 아니었다. 1953~1971년 연탄가스 중독 사망자가 1만 2653명으로 추정됐을 정도로 안타까운 사고 소식은 하루걸러 하루꼴로 전해졌다. 안전한 연탄은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연탄제조업체도 유독성 가스가 없는 안전한 연탄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1962년 7월 18일 자 부산일보 3면에 초량연료기업사가 낸 초량화학연탄 광고에서도 “장구한 연구 결과 유독성 가스가 없어 인명에 피해가 없고 경제적인 화학연탄 제조에 성공했다”는 걸 강조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산업은 “연료계의 반가운 소식”이란 카피 아래 “가스가 완전 제독됐다”는 발명특허품 재건탄을 광고했다. 1963년엔 태양연료사가 “냄새가 없고 완전 제독된” 발명특허품 경제탄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연탄가스 해독제도 속속 등장했다. 1969년 8월 9일 자 부산일보 6면에 한국연료화학은 “일산화탄소와 아황산가스 제거로 생명 보호와 모든 질환을 예방한다”며 연탄가스 해독제 발매 소식을 전했다. “화로에 더운 물 2홉가량 붓고 연탄을 갈아 넣으면 된다”면서 덤으로 “화력이 강해져 연간 65장의 연탄을 아낄 수 있다”고 했다. 며칠 뒤 한성물산도 “한 달 120원이면 당신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며 연탄가스 제독제 ‘까스안나(Gas Anna)’를 광고했다. “연탄을 갈 때 20g 이상 뿌려주면 일산화탄소를 완전 연소시켜 유독가스를 막아준다”고 선전했다.
현실은 광고와 달랐다. 서울대보건대학원이 1972년에 연 제1회 연탄가스 중독 학술세미나에선 예방을 위한 뾰족한 해결 방안이 없으니 치료 방법에 주안점을 둬 고압산소치료기의 확대 보급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도 연탄가스 중독사고는 여전했다. 1989년 9월 26일 자 부산일보 15면엔 사상구 모라동에서 여성 노동자 전용아파트에 월세로 입주한 주경야독의 두 자매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졌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낮엔 공장에 다니고 밤에 여상 야간부에 다니던 10대 자매가 우범지역이라 창문을 꼭 닫고 잠자다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박봉에도 전남 화순의 부모에게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던 효녀들이었다.
들쑥날쑥한 연탄 수급도 골칫거리였다. 겨울마다 연탄공장에선 철야를 하며 연탄을 찍어냈지만 연탄 품귀 현상은 되풀이됐다. 1966년 장당 15원이던 연탄값을 8원으로 묶는 강력한 가격 통제 정책의 역효과로 1차 연탄 파동이 벌어졌다. 공급량 부족으로 값은 되레 서너 배나 뛰었다. 동일연료는 1967년 10월 24일 자 부산일보 7면에 하루 15만 장 대량 생산하는 왕표연탄 동래공장 준공 소식을 광고로 전했다. “연탄 파동을 경험한 뒤 급격히 증가하는 수요에 맞춰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 것을 통감한 나머지 당국의 지원을 받아 동래역 구내에 대단위 연탄공장을 설립해 시민의 연료 걱정을 덜어드리기로 결심하고 6개월여의 심혈을 경주해 완공했다”고 그간의 경과를 밝혔다.
1974년에도 전국적인 연탄 품귀 현상이 재연됐다. 석유파동을 겪은 정부가 연탄 사용을 독려하면서 겨울철 연탄 부족 사태가 예상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너도나도 봄부터 사재기에 나서면서 2차 연탄 파동이 벌어졌다. 그해 여름에 이미 생산량이 바닥 나 연탄값은 장당 30원까지 올랐고 울릉도에선 80원까지 치솟았다. 부산 지역도 변두리와 고지대에선 돈을 주고도 연탄을 살 수 없었는데, 이웃에 연탄을 빌리거나 낱개 연탄을 사러 시내까지 나간다는 기사도 그즈음 신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연탄 한 장이라도 더 가져가겠다고 연탄판매소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영도구 관내 저지대 동민이 고지대 동민과 자매결연을 맺고 연탄나눠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미담 기사가 실린 것도 그즈음이다.
연탄이 넘쳐 감당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1971년 12월 1일 자 부산일보 1면엔 부일·초량·왕표연탄이 연합해 ‘연탄복지센터’를 만들었다는 광고를 실었다. 부산지역 연탄 공급량의 50%가량을 점유한 3개 연탄제조업체가 경영합리화를 위한 기업 합병을 목표로 일단 공동판매·공동선전이란 연합전선을 편 것이다. 같은 달 17일 이들 업체는 연탄 20장 살 때마다 경품권 1장을 준다며 냉장고 TV 카메라를 내걸고 경품행사 광고를 냈다. 이들 업체에 맞서 열흘 뒤 이번엔 보림·일자표·대흥·협동연탄이 ‘부산연탄센터’로 뭉쳐 경품 행사 광고를 냈다. 냉장고 TV에다 피아노와 금반지까지 경품으로 얹어 맞불을 놨다. 부산지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7대 연탄제조업체의 보기 드문 출혈 경쟁이었다.
부산지역 연탄제조업체들이 2개 그룹으로 갈라져 과당 경쟁을 벌인 건 연탄 저탄량이 15만t으로 월동 목표량 11만t을 4만t이나 초과한데다 봄날처럼 따뜻한 이상 난동 현상으로 연탄 소모량이 전년보다 30%가량 떨어졌기 때문이다. 장당 25원 50전 하던 연탄도 20원에 덤핑 판매했다. 이듬해 기류는 달라졌다. 연탄제조업체들이 원상회복을 넘어 장당 28~30원까지 인상을 요구했다니 말이다.
롤러코스트처럼 요동치는 연탄값과 수급 불안에 서민의 겨울나기도 힘겨웠다. 새끼줄에 매달아 손에 들고, 고무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는 식으로 한두 장씩 낱개 연탄을 사야하는 서민에겐 창고 가득 연탄을 쌓아두는 게 소원이었다. 가득 쌓인 연탄을 바라보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훈훈하게 데워졌던 시절이었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