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㉓ 특정 외래품 단속
껌팔이 아이들 판매원 제복 입혀 계몽 활동에도 동원
1965년 8월 28일 자 부산일보 7면에 ‘부산시 국산품 껌팔이 소년 직업 보도식’이란 광고가 실렸다. “우리 롯데 껌팔이 소년들은 샐러리맨으로 거리에 나섰습니다”라는 글귀가 아이 글씨처럼 비뚤비뚤 적혀 있고, 까까머리 소년과 단발 소녀가 제복을 맞춰 입고 도열한 사진이 함께 실렸다. 광고가 실리기 일주일 전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부산시경과 롯데제과, 그리고 BBS운동부산시연맹이 주관한 행사였다. 거리에서 미제 껌과 과자를 몰래 팔던 아이 348명이 롯데제과 판매원 제복을 입고 플라스틱 껌팔이 통을 받아 공식적인 영업사원(?)이 됐음을 알리는 신고식이었다.
껌팔이 소년의 수기를 원작으로 그해 개봉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든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주인공처럼 광고 문구엔 희망에 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껌팔이 소년은 이제 어엿한 월급쟁이가 됐습니다”라는 문구처럼 롯데제과는 아이들에게 롯데 껌을 판 실적에 따라 월급을 줄 거라고 약속했다.
껌팔이 소년 직업 보도식이 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강력한 외제 단속과 짝을 이룬 ‘국산품 애용 운동’이었다. “‘미제 껌도 있습니다’라며 남의 눈을 두려워하던 비굴한 소리도 낼 필요가 다시는 없게 됐습니다. 우리 모두 국산품을 애용해야 하고 어느 외국산보다 우수한 롯데 껌을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권하게 됐습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이를 짐작하게 한다.
1968년 5월 25일 자 부산일보엔 “부산시경 보안과가 시내 모범 껌팔이 소년·소녀 50명에게 제복과 껌 200개씩 나눠줬다”는 미담 기사가 실렸다. 제복에 ‘외래품 안 쓰기 운동’ 표어를 달고 외래품 추방 운동에 앞장서게 할 것이란 문장이 뒤따랐다. 국산품 애용이 곧 애국이었던 시절, 애국심에 호소한 계몽 활동에 길거리 아이들을 활용할 요량이 컸던 거다.
당시만 해도 미제 껌 판매는 엄한 단속 대상이었다. 1961년 5월 정부는 국내 산업을 저해하거나 사치성 있는 특정 외래품의 판매를 금지해 국내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공포했다. 과일부터 과자, 화장품, 양주, 연필, 안경, 양말, 선풍기, 심지어 반창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상품이 해당됐다. 1961년 9월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 첫날 단속 풍경은 이랬다. “국제시장 내 서너 곳의 양품점 진열장은 텅 비었고, 동아극장 앞 골목 화장품 노점상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고 단속의 실효성이 컸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1965년 2월 15일 자 부산일보엔 ‘껌팔이들만 잡혀’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산시경이 13일 오후 1시를 기해 시내 전 일선 경찰관을 동원해 관할 구역을 바꿔 특정 외래품 일제 단속에 나섰는데, 단속에 걸려든 건 대부분 껌팔이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경찰은 국산 껌 3만 개를 사서 압수된 미제 껌만큼 교환해줬다고 하니, 이날 압수된 미제 껌도 얼추 그 수준이었을 것이다.
정기적인 단속으로 외제 사용을 발본색원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절되지 않은 대표적인 품목이 양담배였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거나 밀수한 양담배가 시중에 나돌았는데,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양담배 연기는 자욱했다. 1970년 전매청의 양담배 적발 실적이 175만 8000보루, 벌과금 7266만 8000원을 기록할 정도였다. 1971년 12월 11일 부산일보 사설에서도 ‘양담배의 단속’이란 제목으로 시중의 양담배 범람 현상을 질타했다. “국산 담배인 청자 담배가 귀한 데다 품질마저 떨어져, 요정이나 주점, 다방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양담배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며 대책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사설은 또 “양담배 흡연자 계층이 주로 권력 기관원, 회사 간부, 언론인, 예술인 등의 순으로 밝혀졌다”면서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으로 봐 국산품을 애용하려는 정신 자세가 사회 지도층에 결여됐다는 일면을 본 것이 유감”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사회 지도층뿐만 아니라 정작 단속 공무원조차 대놓고 양담배를 피워댔으니, 양담배 근절의 호소가 시중에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는 만무했다. 1970년 12월 3일 자 부산일보엔 이런 기사가 나온다. “연말연시 밀수사범과 특정 외래품 단속을 주 임무로 발족한 관세청 감시선단본부 수사요원들이 단속 첫날 경남 통영의 모 식당에서 호화판 점심을 먹었는데, 이들이 한바탕 먹고 마신 뒷자리의 재떨이와 방바닥엔 양담배 껍질과 꽁초가 버려져 있어서 마치 권력을 과시한 듯하더라”는 내용이었다. “외래품 소각 처분이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이라며 기사 말미엔 날 선 풍자도 잊지 않았다. 양담배는 국산 담배와 연기부터 다르다는 우스갯소리가 풍문처럼 떠돌던 시절이었다.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은 1982년 12월 31일부로 폐지됐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