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㉔ 파이낸스 전성시대
IMF 위기를 먹잇감 삼은 약탈적 금융사기극
1997년 12월 5일 자 부산일보 31면에 부산시 파이낸스 연합회 명의의 광고가 실렸다. 삼부파이낸스를 중심으로 부산지역 11개 파이낸스사들은 “금융 자율화 시대의 새로운 여신 전문 금융회사”를 자처하며 “더욱더 믿고 거래해도 좋다”고 항간의 불안감을 불식시키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부산지역 파이낸스 회사들은 최근의 금융 위기에 따른 중소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더욱더 활성화된 자금지원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국가 부도 사태인 ‘IMF 외환 위기’로 온 나라가 매서운 겨울 한파에 떨던 1997년 말부터 파이낸스 업계는 되레 전성기를 구가했다. 자고 나면 파이낸스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부산에 전국 파이낸스사의 40%가량이나 몰리면서 유독 파이낸스사가 기승을 부린 건 지역 금융 기반이 취약한 탓이 컸다. 파이낸스사는 동남은행과 한솔·신세계·고려·항도 등 4개 종합금융회사가 줄줄이 퇴출당하면서 생겨난 지역 금융 공백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허물어진 지역 금융 기반을 역으로 공략해 제도권 금융기관이 보장하지 못하는 높은 이자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덩치를 키웠다.
1999년 8월 27일 자 부산일보 7면에 S.D 투자자산운용㈜는 “배당률이 높으면 위험률이 높다고요? 천만에요! 저희 S.D는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카피 아래 “확정 배당률 연 29.9%, 목표 수익률 연 120%, 위험률 0%”라는 광고를 실었다. 1억 이상 투자자에겐 아프리카 7박 8일 여행권, 10억 이상 투자자에겐 체어맨 1대와 콘도회원권을 주겠다고 했다. 연 120%의 수익률을 내면서도 아무런 투자 위험이 없다는 광고는 수익률이 높을수록 위험도 커진다는 금융 투자의 기본 원리에도 맞지 않지만, 투자자들은 그런 상식조차 예사로 듣고 귓전으로 흘려보냈다.
파이낸스사의 약속은 달콤했다. 파이낸스사마다 30~40%의 확정 배당률과 손실의 위험이 전혀 없다는 감언이설로 고객을 유혹하기에 바빴다.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경품은 기본이었다. 현대 다이너스티 승용차(대한파이낸스), 38평형 아파트(반도파이낸스)처럼 자동차와 아파트를 경품으로 내걸고, “2000년 새해를 유럽에서”(한미파이낸스), “유럽 일주 15일”(한독파이낸스) “7박 8일 유럽여행권”(종금파이낸스)으로 유혹했다. LC파이낸스가 “투자의 참이익은 경품이나 여행권이 아니라 최고 이율배당에 있다”고 광고할 정도였으니 파이낸스 업계 내 경품 경쟁이 얼마나 과열됐는지 짐작가고도 남는다.
고금리와 경품만큼이나 중요한 파이낸스의 광고 영업 전략은 안전한 금융 상품임을 강조하는 거였다. 유명 배우와 인기 가수를 내세워 “안전한 투자”(삼부파이낸스), “안전한 금융회사”(청구파이낸스), “50억 임원배상책임보험 가입”(금강파이낸스·한독파이낸스) 따위의 말로 끊임없이 고객을 안심시켰다.
파이낸스사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고 믿음직한 금융회사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사회공헌 활동 홍보에도 공을 들였다. 청구파이낸스는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를 불러모아 화려하게 청구 마린스 실업축구단 창단식을 했다(창단 한 달 만에 대표가 잠적하고 5개월 만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노숙자와 보육원 원생 돕기 행사(반도파이낸스), 사랑의 열린음악회(LC파이낸스), 영화 ‘용가리’ 투자·부산씨름협회 회장사(삼부파이낸스) 등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NC파이낸스는 창립 2주년을 기념해 1999년 5월 11일 자 부산일보 20면에 기사형 전면광고를 싣고 “투명경영, 신용경영 솔선수범. 97년 10월부터 1억여 원 투입해 파이낸스 종합 관리 프로그램 개발” 따위의 문구를 동원해 건실한 우량기업으로 포장했다.
이들은 지점을 확장하고 계열사를 거느린 그럴싸한 그룹으로 외형도 키웠다. 삼익파이낸스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오사카에도 지점을 내며 국·내외 지점망을 갖췄다고 선전했고, 전국 56곳에 지점을 둔 종금파이낸스는 종합건설, 주택개발, 정보통신, 중공업, 무역 등 계열사를 둔 종금그룹을 자처했다.
사옥을 짓고 젊은 직원을 채용한 전문적인 투자 금융회사라는 번지르르한 외관과 달리 속은 텅 비었다. 파이낸스사들은 자본금 5000만 원만 있으면 누구나 설립할 수 있는 상법상의 법인에 불과했다. 금융당국의 통제와 감독 없이 운영되기 때문에 금융사고의 위험은 상존했다. 신규 고객 자금이 들어오면 이를 기존 고객에게 이자로 지급하는, 소위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위험한 경영 방식이었다. 무리하게 지점을 확장하는 것도 눈먼 돈을 새로 확보하려는 욕심이 컸다. 직원 채용 조건으로 수천만 원의 출자금을 받고도 임금을 체불하기 예사였다.
독버섯처럼 무섭게 번진 파이낸스사의 부실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급불능 사태에 문을 닫는 파이낸스사가 늘어났지만, 연 7% 안팎의 은행 금리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고객들에게 높은 이자의 유혹이 가져올 비극은 남의 일로만 여겨졌다. 전국은행연합회를 비롯한 금융협회들은 1999년 4월 22일 자 부산일보 4면에 “파이낸스사와의 거래는 예금자 보호대상이 되지 않습니다”며 주의를 환기했다. 오십보백보지만, 파이낸스 업계 내부에서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광고를 자주 실었다. 1999년 5월 18일 자 부산일보 27면에 부산시 파이낸스 협회 명의로 “등록조차 안 된 금융피라미드 업체와 유사 파이낸스사들이 불법 영업을 일삼고 있어 선량한 투자자들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며 재무건전성 등을 따져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반도파이낸스는 1999년 9월 1일 자 부산일보 24면에 ‘참붕어와 붕어빵’이란 카피로 “상식 밖의 고금리와 비정상적인 영업방식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회사를 경계하고, 업계 최초로 문화일보 선정 ‘히트상품 2관왕’을 달성한 알짜배기 파이낸스사에 투자하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1999년 1월 26일 자 부산일보 9면에 OCL파이낸스는 “일부 파이낸스사의 고객 출자금 지급 불능 사태에 직면하면서…”라는 카피로 선량한 투자자의 피해를 우려하는 투의 광고를 실었지만, 금세 ‘악어의 눈물’로 들통났다. 출자금 100% 보장과 100만 원 이상 출자자에게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경품으로 내놨던 OCL파이낸스는 광고를 낸 지 넉 달도 지나지 않아 대표가 10억 원가량을 가로챈 뒤 잠적하고 문을 닫았다.
파이낸스 사태가 수면 위로 떠 오른 건 1999년 9월 10일 파이낸스 업계 1위이자 원조 격인 삼부파이낸스의 양재혁 회장이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다. 업계 2위이던 청구파이낸스도 나흘 뒤 돌연 영업을 중단하고 임직원이 잠적했다. 신규 출자가 막히고 기존 투자자들이 일제히 중도환매를 요구하면서 유동성 문제에 부닥친 파이낸스사는 줄줄이 문을 닫았다. 양 회장은 고객 투자금 1116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5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결과적으로 80여 곳의 파이낸스를 포함해 유사금융업체 160여 곳에 2조 6000억 원가량을 투자한 7만 5000여 명이 8200여억 원을 날렸다. 삼부파이낸스에서만 1만여 명이 1조 원가량 투자했다가 3000억 원가량을 떼였다. 1000억 원 이상 수신해 수백억 원대의 피해를 준 업체만 6곳에 달했다. IMF 외환위기 고통을 먹잇감으로 삼은 약탈적 금융 사기극이란 걸 알아챘을 때는 너무 비싸고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난 뒤였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