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광고풍속도] ㉕ 신발산업
부산을 먹여 살린 달콤쌉싸름한 OEM의 배신
1956년 10월 19일 자 부산일보 4면에 국제화학이 “국민 대중의 불가결한 필수품인 고무화 품질 개선에 매진한 결과 500여 점이 출품된 국산품 전시회에서 최우수품으로 선정됐다”며 왕자표 고무신 광고를 실었다. “고무화는 왕자표가 제일이라고 세간에 회자해 방방곡곡에서 절대 호평을 받고 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 ‘왕의 아들(王子)’이 아닌 ‘고무신의 왕’을 표방한 ‘왕자(王者)표’의 자존심이었다.
한국 신발산업의 서막은 고무신이 열었다. 국제화학 왕자표, 태화고무 말표, 삼화고무 범표, 동양고무 기차표, 진양고무 진양, 보생고무 타이어표, 대양고무 사자표 등이 당시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고무신 상표였다.
고무신도 품질 개선이 관건이었다. 1966년 3월 21일 자 부산일보 4면에 동양고무는 “현상 100만 원짜리 하이힐 고무신”이란 광고를 냈다. 요즘으로 치면 키높이 고무신을 홍보하는 경품 광고다. “여성의 키를 크게 보여주고, 여성의 걸음걸이를 바로잡아 주고, 신경통에 고생하는 여성에 효과가 많다”고 선전했다. 스펀지로 안창을 댄 스펀지 고무신도 동양고무가 밀던 품목 중 하나였다.
1963년 11월 20일 자 부산일보 4면에 국제화학은 “기술과 품질을 자랑하는 왕자표 고무신, 해외로 진출”이란 광고를 냈다. “원양어로에 출어하신 아빠에게 왕자표 장화를, 해외에 유학 가신 형님에게도 왕자 농구화를, 외국에 거주하는 누나에게도 왕자표 고무신을 보냈다”는 문구와 함께 “우리 가족은 왕자표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1962년 태화고무가 11만 9000달러어치 장화 12만 8000켤레를 미국에 수출한 것이 한국 신발 수출의 시작이었다. 그해 국제화학도 농구화를 국내 최초로 일본에 팔면서 수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68년 3월 19일 자 부산일보 5면에 태화고무가 “세계로 뻗는 태화 신발, 월남에 보내는 말표 정글화”라는 광고를 실은 것처럼 베트남 전쟁 특수도 부산 신발 수출에 날개를 달았다. 뭐니해도 결정적인 계기는 1974년 삼화고무가 이름을 바꾼 ㈜삼화가 나이키와 거래를 트면서 부터다. 세계 유명 브랜드의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신발산업은 부산을 먹여살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국제상사로 이름을 바꾼 국제화학이 사상구에 세계 최대 신발공장을 세운 것을 비롯해 부산은 세계 최대의 운동화 생산기지로 성장했다. 신발업이 호황을 누릴 때 부산 업체들은 외국 바이어에 쩔쩔매기는커녕 오히려 군림했다고 한다. 수출 단가도 업체에서 먼저 정해 통보만 해도 바이어는 인상된 단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 국제 경쟁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1986년 11월 29일 자 1면에 화승은 ‘371,910,548’이란 숫자를 크게 실었다. 동양고무를 모태로 하는 화승이 르까프를 출시한 그해 신발 수출액이 3억 7191만 달러로 역대 1위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광고였다. 1973년 1억 달러를 달성한 부산 신발산업은 1990년 43억 705만 달러 수출로 정점을 찍을 때까지 봄날을 만끽했다.
OEM의 열매는 달콤쌉싸름했다. 내수보다 수출로 먹고살았다. 1965년 6.7%에 불과했던 수출 비중은 1972년을 기점으로 내수를 앞지르더니 1982년엔 무려 83.2%에 달했다. 자체 브랜드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외국 유명 브랜드로 벌어들이는 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게 결정적인 함정이긴 했다.
OEM이 ‘독이 든 사과’임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자체 브랜드 개발을 위한 노력도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신발 주력 품목이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뀌면서 왕자표는 프로스펙스, 말표는 까발로, 범표는 타이거, 기차표는 프로 월드컵, 진양은 유니 스포츠, 사자표는 슈퍼 카미트라는 브랜드로 국내외 소비자를 공략했다.
애국심에 호소한 마케팅도 펼쳤다. 프로스펙스로 시장을 공략하던 국제상사는 1983년 9월 10일 자 부산일보 11면에 “아직도 외국 상표의 스포츠화를 찾고 계십니까”라는 카피로 광고를 실었다. “무심코 지불한 스포츠화 값의 일부가 로열티라는 명목으로 외국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상표의 스포츠화를 신읍시다”라고 읍소했다. 그러면서 “우리 고유의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외화를 절약하고 나아가서 외화를 획득하는 길”이라고 웅변했다.
1983년 11월 23일 자 부산일보 12면에 ㈜삼화도 “우리는 무엇을 입어도 무엇을 신어도 변할 수 없는 한국인. 우리는 진정한 스포츠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한국인의 스포츠화 타이거를 신는다”는 광고를 실었다. “외국 상표 로열티 때문에 7억 5000만 달러(6000억 원) 이상의 외화를 낭비했다”며 “타이거 기술로 만든 세계 정상급 품질의 스포츠화가 8800만 켤레 이상 세계 각국으로 수출돼 스포츠 기술 한국을 빛내고 있다”고도 했다. ㈜삼화는 1984년 2월 14일 자 부산일보에 “우리 발에 꼭 맞는 더욱 우수한 한국인의 스포츠화를 개발하기 위해 발 크기, 몸무게, 키 등과 함께 아이디어를 모집한다”는 공모 광고를 내고 한국인 체형에 맞는 국산 브랜드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홍보전을 펼치기도 했다.
다만 “리복이나 나이키, 아디다스, 퓨마 등 140여 개 외국 유명 브랜드 대부분이 한국 신발 제조 기술로 생산되고 있어서, 상거래 도의상 우리 상표로 이들 바이어와 경쟁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는 당시 업계 관계자의 인터뷰에 미뤄 해외 유명 브랜드와 전면전을 펼칠 엄두까지는 내지 않았지 싶다.
부산의 신발산업은 1990년대 초 롤러코스터의 정점에 올랐다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도산하는 업체가 속출한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불황을 겪었다. 수출의 95%가량을 OEM에 의존했다가 기어코 발목이 잡힌 거다. 1980년대 말 환율, 원자재, 인건비의 3고(高) 현상으로 제조원가가 급격히 오르자 해외 바이어들은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를 쓴 동길산 시인의 표현대로 “운동화 만들어 달라고 통사정하던 나이키 같은 데가 변심하면서, 그야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서 1990년대는 눈물 젖은 빵을 삼켜야 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다시 뛰어야 한다는 외침도 끊이지 않았다. 1997년 4월 1일 자 부산일보 3면에 ㈜트렉스타가 “세계 최고의 신발은 여전히 부산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실었다. “OEM을 박차고…제대로 만들어 제 이름을 달고 뛰자! 우리 이름으로 세계를 누빕니다”라는 문구로 결의를 다졌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덧붙이는 말> 1969년 12월 23일 자 부산일보 7면에 난 이태리양화점의 광고에서 부산 신발산업 부활의 실마리를 찾았다. 전국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을 기념한 광고였는데, 광고 카피가 “양화(良靴)는 악화(惡靴)를 구축(驅逐)한다!”였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을 재치 있게 패러디한 광고였다. 품질의 자신감을 강조한 광고에서 부산 신발산업의 살길이 엿보였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