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공감과 해법의 저널리즘으로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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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 대부분의 언론사는 ‘객관적 저널리즘’을 지향한다. 〈부산일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부산일보〉는 ‘미디어 비평’란의 신설 취지로 “가짜 뉴스가 횡행하고 포털이 여론 동향을 좌지우지하는 미디어 현실 속에서 주요 이슈를 다루는 각 매체의 태도와 그 이면을 분석해 객관적 저널리즘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객관적 저널리즘은 취재 보도에서 사실(fact) 추구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취재 과정에서 이중삼중의 확인 절차를 거쳤음에도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보도를 하지 않는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 않는’ 신중함이야말로 가짜 뉴스와 구별되는 정통 언론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실을 확인했다면 그 대상이 누구든, 심지어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일지라도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다. 이것이 객관적 저널리즘의 힘이다.

모바일 시대, 객관적 저널리즘 한계

사실 확인 방기, 공감 노력도 부족

다양한 시민의 편에서 함께 느끼고

여러 해법·대안 찾는 언론 역할 필요

그런데 이용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모바일 환경에서 객관적 저널리즘의 사실 확인 절차는 완연히 무뎌졌다. 한 언론이 보도하면 너도나도 우르르 몰려가는 ‘패거리 저널리즘’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가장 극명한 사례가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였다. 나아가 해당 재난방송에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훈련받은 방송 기자들은 오로지 ‘관찰자’로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대했다. 동일한 현장에 있더라도 ‘관찰자’와 ‘당사자’가 접하는 사실(죽음)의 무게감은 전혀 다른 법이다. 침몰하는 배를 지켜보면서 희생자 유족들에게 이미 감정이입이 된 시청자들 앞에서, 보험금 운운하며 연중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와 비교해 별것 아닌 사고라는 식의 보도가 나온 배경이다. 한국 기자들이 싸잡아 ‘기레기’로 매도되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다. 객관적 저널리즘을 고수하려면 이런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관행으로 굳어 버린 탓에 잘 고쳐지지 않는다. 객관적 저널리즘의 성과도 상당하기에 무작정 배척할 수만도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권좌에서 내려온 것도 언론이 여러 객관적 증거들을 들이밀며 대통령의 옹색한 변명을 무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저널리즘을 유지하되 보완해야 할 측면으로 ‘공감의 저널리즘’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년부터 부산과 헬싱키 간의 장거리 직항노선이 열린다고 하니, 서울의 한 주요 신문사가 변죽을 울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300억 원의 손실(핀에어가 거두어가는 국내 항공사의 손실)’ 대 ‘40억 원의 이익(부·울·경 주민이 인천을 경유하는 데 드는 비용)’ 싸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40억 원에는 교통비만 반영됐을 뿐, 드는 시간이나 불편함 같은 주관적인 비용은 정확히 산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얼추 260억 원의 손실 계산이 나왔는데도, 해당 신문사의 기사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서울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관심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부산일보〉 관련 기사에는 4000건이 넘는 응원 댓글이 달렸다. 객관적인 사실을 숨기지 않되, 부산 시민의 편에서 기사를 낸 까닭이다.

공감의 저널리즘이라고 약점이 없진 않다. 누구의 편에서 공감할 것인가가 딜레마인 경우가 많다. ‘내로남불’이라고, 동일한 현상을 달리 해석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최저임금에 대한 노사 양측의 생각이 다르고, 일본의 수출 규제를 대하는 ‘반일(反日)론자’와 ‘지일(知日)론자’의 극일(克日) 방법이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 ‘해법 저널리즘(solutions Journalism)’의 도움이 추가로 필요하다. 이는 단일한 해법(solution)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 문제는 수학처럼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언론은 다양한 시민의 편에서 각각의 해법을 충실히 제시하면 된다. 경우에 따라 해법들이 상충할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정치라는 별개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간 우리 언론은 한쪽으로 편향된 해법만 제시하면서 그걸 여론이라 강권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처럼 정보를 습득하는 경로가 제한되었을 때는 유효했겠지만, 지금은 최첨단 스마트폰 시대이다. 무기가 바뀌었으면 전투 방법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널리즘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든다며 스마트폰만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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