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반일’과 ‘극일’ 사이, 군함도를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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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권 부경대 정외과 교수

일본이 기어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함으로써 양국 간 끝을 알 수 없는 경제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 야당과 언론이 부풀려온 경제위기론으로 불안이 가중되는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합리적 선택만 따지는 ‘극일론’

한·일 관계 역사적 특수성 무시

‘화이트 리스트’ 제외 경제전쟁

일본 우익의 계획된 도발 행위

오욕의 역사 반복돼선 안 돼

반일·극일 프레임 이제 넘어서야

상황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는 일부 보수 세력의 시각은 안이하기 그지없다. 한·일 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은 물론 일본 우익세력이 갖고 있는 정치적 목표에 대한 이해 부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반일’이 아닌 ‘극일’을 이야기한다. 일본을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과 화합하되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일본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극일’이 한·일 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합리적 선택의 관점에서 한·일 간의 최적화된 교환조건을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피와 살이 붙어 있는 생명체로서의 한국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도 아니면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인이 살아낸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일 것이다.

보수 세력이 주장하는 극일론은 개화기 일본을 등에 업고 부국자강을 꿈꿨던 친일 급진 개화파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런 개화파가 득세해 일본을 끌어들인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던 간에 급진적인 근대화를 통한 ‘극일(?)’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도 극일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극일론이 주장하듯 이번 사태가 과연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미숙한 대응 때문에 초래된 것일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정치·경제적 시각을 갖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사태는 새로운 일본을 외치며 군사대국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일본 우익세력의 철저히 계획된 도발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은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일본의 우익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하잘것없는 명분 하나면 족했다. 문재인 정부가 십분 양보해 대법원 판결에 유감을 표하거나 판결을 실행에 옮길 현금화 조치를 유보할 것을 약속하였다면 일본의 우익이 과연 도발을 멈추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최근 항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일본 극우정치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회의’의 치밀한 계획과 전략은 결코 그들의 목표가 단순히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불만 하나 해소하자는 데 있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영화 ‘군함도’를 다시 보았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의 상징이 되어 온 지옥섬 ‘하시마’의 진실을 담은 영화 ‘군함도’의 클라이맥스를 이끄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몰래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변절한 독립운동가 윤학철이 그를 구하기 위해 군함도로 위장 잠입한 OSS 대원 무영에게 살해된 후 징용노동자들이 군함도 탈출을 놓고 격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당장 탈출하자는 쪽과 그래도 일본인들과 협상을 해보자는 쪽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반일’과 ‘극일’로 대비되는 두 가지 주장이 맞부딪친 셈이다. 결국 ‘반일’의 탈출파 쪽으로 대세가 기울면서 군함도 탈출이 시도되고,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극일’의 협상파는 군함도에 남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갈렸는가? 협상파는 대화와 타협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던 일본인들의 방화로 모두 목숨을 잃었다. 탈출파 역시 군함도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군함도를 벗어나는 석탄보급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물론 극화된 영화라 사실성을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다시 본 영화 ‘군함도’는 ‘반일’과 ‘극일’의 상반된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오늘의 현실이 그와 다를까? 메이지 시대의 영광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군국주의 아베 일본의 계획과 전략 앞에 ‘반일’과 ‘극일’의 대립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태를 통해 일본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과거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전후의 보이지 않는 경제적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군함도를 탈출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군함도에 머물러 온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하나뿐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 오욕의 ‘군함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남기를 원하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대들은 ‘군함도’에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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