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민달팽이
패닉의 ‘달팽이’는 언제 들어도 좋다. 비 오는 날엔 촉촉한 감성을 건드리고, 맑은 날엔 따뜻한 위로를 준다. 기껏 시속 80m로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라는 후렴구는 세상에 지쳐있을 때 다시 꿈꿀 힘을 줘서 좋다. 그 노래를 들으며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 〈달팽이 안단테〉다. 희귀 질환으로 병상 신세를 진 작가가 달팽이를 1년간 관찰한 기록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는 고백도 고백이려니와 직접 세봤는지는 모르지만 달팽이 이빨이 2640개였다는 것과 미세한 잔물결의 띠를 이루며 기어가는 달팽이 생태를 묘사한 대목 하나하나가 놀랍다.
달팽이의 낭만은 집이 없는 민달팽이에서 무참히 깨진다. 완벽한 기하학적 곡선과 비율에 따라 만든 경이로운 나선형 껍데기라는 달팽이 최대의 무기는 퇴화했다. 껍데기가 없는 바람에 달팽이보다 쉽게 모양을 바꿀 수 있어 더 작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보호막이 없는 건 치명적이다. 게다가 껍데기가 없는 민달팽이는 흐물흐물한 연체동물 특유의 기괴함 탓에 흉측스럽다. 배추 이파리를 사정없이 갉아 먹고 점액을 분비해 배추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민달팽이는 농부에겐 해충이기도 하다.
민달팽이의 생태보고서는 인간 세상에서도 가혹하다. 집 없는 민달팽이처럼 열악한 주거 환경 탓에 도시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청춘들의 또 다른 이름이 민달팽이족이다. 쫓겨날 걱정 없이 집 한 채 짊어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부러운 이들이다. 〈부산일보〉 ‘부산 청년 미래보고서’ 기사 중에서 집 없는 청년의 임시피난처가 된 민달팽이촌 안에서도 빈부 격차가 생기고 월세가 큰 폭으로 오르면서 청년의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긴다는 대목은 특히 아프다.
매년 10월 첫 주 월요일(올해는 10월 7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주거의 날’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적절한 주거 보장의 지구적 책임을 강조하고, 주거권이 상품이 아니라 기본 인권임을 알리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그에 맞춰 5일엔 대학생 주거권 보장을 위한 자취생 총궐기도 예정돼 있다. 주택 보급률이 일찌감치 100%를 넘었지만 발 뻗고 쉴 집이 없고, 타워팰리스보다 고시원의 평당 월세가 더 비싼 세상이다.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에서 사는 청춘들이 패닉의 ‘달팽이’처럼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나아가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이상헌 논설위원 ttong@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